[천자칼럼] 한·일 엔터 동맹
“국내 영화산업이 홍콩 영화에 밀려 존립 위기에 처해 있는데, 막강한 자본을 갖춘 일본 영화까지 수입을 검토한다니 문화 종속이 우려된다.”

1992년 7월 국내 일간지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이즈음 아시아 영화산업의 종주국은 단연 일본과 홍콩이었다. 각각 두 나라의 최대 배급사인 도호와 골든하베스트가 그 정점에 있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나오는 이들의 로고는 아시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나타내는 심벌이었다. 골든하베스트 정문 앞에는 이 회사 영화를 들여오려는 한국 영화사가 줄을 섰다. 한국 정부가 일본 문화를 개방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도호에도 일본 영화를 선점하려는 한국 배급사와 대기업이 몰려들었다. 국내 영화산업은 곧 고사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30여 년 전 한국 문화산업의 열악한 상황을 곱씹다 보면, 최근 CJ ENM과 도호의 협약이 얼마나 상징적 사건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도호의 미국 법인이 CJ ENM의 미국 법인에 2900억원을 투자해 2대 주주에 올라서는 내용의 계약이다. 한국과 일본의 최대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손잡고 미국 시장을 공동 공략하는 모양새지만, 실제론 도호가 CJ ENM에 “수업료를 낼 테니 해외 진출 경험을 공유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도호의 콘텐츠를 리메이크하거나 새로 만드는 작업도 CJ ENM이 맡을 계획이다.

도호는 1950년대부터 <7인의 사무라이> <카게무샤> 등 세계적 반열에 오른 작품을 배급하며 글로벌 유통망을 뚫어왔다. 지금도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등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들의 작품 배급을 전담한다. 이런 회사가 이제는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노하우를 배우고, 자사의 콘텐츠를 재가공해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맡기기로 한 것이다. K콘텐츠의 세계적 위상을 재확인하게 해준다.

30년 전 도호와 함께 아시아 영화시장을 양분한 골든하베스트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급격히 쇠퇴하다가 중국 영화사에 매각됐다. 다양한 문화적 색깔과 자유를 담아내던 홍콩 영화도 이즈음 중국의 통제와 함께 쇠락했다.

고경봉 논설위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