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드웨이’ 주인공 잭과 마일즈가 오리건주 와이너리를 방문해 와인잔을 들어 올리고 있다.
영화 ‘사이드웨이’ 주인공 잭과 마일즈가 오리건주 와이너리를 방문해 와인잔을 들어 올리고 있다.
영화 ‘사이드웨이’는 물과 기름 같은 두 친구, 잭과 마일즈가 함께 여행길에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잭이 결혼하기 전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고자 떠나는 일종의 ‘총각 여행’이다. 잭은 자유분방하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려 하지만 마일즈는 잭의 난잡한 총각 여행을 경멸하며 매번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한다. 그럴 거면 대체 왜 마일즈가 잭을 따라나섰나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마일즈가 사랑해 마지 않는 와인 투어 때문이다. 아마도 잭이 와인과 우정을 빌미로 마일즈의 등을 떠밀었으리라.

둘은 오리건주의 와이너리들을 돌며 와인을 맛보지만 잭은 와인에 관심이라곤 쥐뿔도 없다. 하나 밤이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잭은 구애하는 공작새가 마냥 매력을 뽐내며 낯선 여성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애착을 보이는 반면 이혼의 아픔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마일즈는 본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성이 눈앞에 있어도 애써 외면한다. 오직 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때만 생기를 띠는 한심한 행동을 보인다.

보는 사람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한 행동을 해대는 마일즈지만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와인 취향이 맞아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는 어느 날 떠났고, 야심 차게 준비한 소설은 번번이 출판을 거절당하고, 이대로는 평범한 영어 교사로 나머지 인생을 무미건조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압도당해 눈앞에 있는 현실의 즐거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일즈는 유독 피노누아로 만든 와인에 강한 애정을 보인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피노누아는 환경에 민감하고 재배하기 까다롭지만, 제대로 키워내면 다른 품종에선 찾기 어려운 섬세하고 우아한 매력을 한껏 지닌 와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품종이다.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의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인내와 애정이 있어야만 하는 피노누아에 마일즈는 자신을 투영한다. 현재 힘든 나날을 보내는 마일즈는 ‘돌봐줄 농부’(아내)도 없고, ‘맞지 않는 토양’(커리어)에서 고군분투하는 피노누아인 셈이다.

포도가 좋은 와인이 되기 위해선 뜨거운 태양이 필요하지만 너무 뜨거워선 곤란하다. 밤에는 태양의 열기를 식혀줄 서늘한 바람이 필요하지만 너무 차가워선 안 된다. 포도엔 매일매일이 기쁨인 동시에 고난이다. 포도가 익었다고 와인이 되는 건 아니다. 짓이겨지고 으깨지며 통 안에서 발효되는 고난의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 향기로움을 간직한 와인으로 변신한다.

영화 속 갈등이 고조되면서 마일즈는 이제 짓밟히고 으깨지는 시간을 겪는 포도즙 신세가 된다. “나란 놈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라며 비관하지만 정작 ‘샛길’이란 영화의 제목처럼 관성과 익숙함에서 잠시 벗어난 여행길이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시든 피노누아같이 구는 마일즈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마야는 말한다. 와인을 보면 와인이 겪었을 삶을 생각한다고. 포도가 자라던 해의 환경과 수확하는 사람들, 와인을 만든 사람들을 떠올린다는 마야는 마일즈라는 포도가 가진 잠재성을 바라본다. 지금은 힘든 시기를 겪을지라도 훌륭하게 잘 만들어진 피노누아 와인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겠노라고.

그가 실패작이라고 여긴 소설을 꼼꼼히 읽어본 마야는 그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글을 써요.” 과연 마야는 으깨진 마일즈란 포도를 품어내는 통이 돼 마일즈의 말처럼 ‘태곳적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피노누아 와인으로 변모시켜 줄 수 있을까. 포도와 와인,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여운을 주는 향기로운 영화, ‘사이드 웨이’다.

장준우 셰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