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 받은 ‘유방암 투병기’… "어떻게사 람이 이런 식로으"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리시올), 2021.
많은 아픈 사람이 구토를 한다. 우리 구토자들에게 토할 곳이 변기뿐이라는 건 속상한 일이다. 밝음이 없는 조명과 상쾌한 공기, 언제나 청결한 상태로 유지되는 적당한 높이의 구토대가 마련된 별도의 공간이 있다면 이 고통도 조금 산뜻해질까. 모두가 낭비라고 생각하는 내 소망을 숙취에 자주 시달리는 친구 한 명만은 지지해주었다.
경험 때문에도 상상을 한다. 유방암에 걸린 앤 보이어는 <언다잉>에서 순수하고 정치적인 장소 하나를 떠올린다. “누구든 필요하기만 하면 적절한 장비를 갖춘 곳에 한데 모여 괜찮은 동지와 울 수 있는” “통곡을 위한 공공장소”. “슬픔을 공유하는 정교한 상상의 건축물”(228)인 이곳은 식은땀과 의사록과 ‘더는못하겠지만그만두면안돼’라는 심정 등으로 축조된다. 여기선 “고통을 공유된 무언가로 마음 편히 드러낼 수 있는 동시에 슬픔에 적대적인 반발은 막아주는 보호막이 제공”(229)된다고 한다. 파토그래피pathography(특정 질병이나 심리적 장애가 개인의 삶 혹은 공동체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에 가까운 보이어의 투병기는 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개념과 해설로 가득하다. 교정지 위에 있는 말들은 주인이 확실할수록 잘 살아남는데, 어떤 말들은 번듯해 보여도 주인을 흐릿하게 만든다. 이 말을 진짜 이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되면 줄이 가고 다른 말로 교체된다. 언제나 말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보이어의 말은 해체되었을 때조차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만의 것이라 오류투성이어도 고칠 필요가 없다. “어떻게사 람이 이런 식로으 살 수 있나 싶은 나날이 드디어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식이긴 했어도 얼굴에 나를 려격해주는 빛이 비치고 나는 조언 을 다랐따”(234).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고문하듯이, 고통받는 사람만이 고통을 헤집는다. <언다잉>은 지독한 당사자적 표현성으로 읽는 사람을 저자의 몸에 ‘관광’시키고 고통에 빠트리며 끝없이 소진되게 한다. 이것이 ‘나’의 고통이니 보라는 듯이. 어떤 독서가 주는 건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불행한 생활 속에서 흘러나와 부유하는 구체적인 감정들, 세계의 조건에 희석되어 있어 공기로는 느낄 수 없는 미지의 슬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부분이다. 그의 존재는 암이 재구성한 세계 속에서도 취약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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