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특집]"아니 위수김이라니…주체사상 운동, 민주화 운동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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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학생운동권 대부분의 최종목표는 사회주의 건설
과거 사상 반성한다는 이유로 변절자라 욕하는 것은 문제 "위수김"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허름한 술집에서 막걸리 사발을 들고 '위수김'을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더니 답변은 놀라웠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위하여"라고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기본 조직은 서클(동아리)과 학과 학회로 이뤄졌다.
서클 중에는 이름이 없는 지하서클도 있었는데, 소규모이고 전투적이었다.
서클과 학회에 가입해서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을 조직화한 운동권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전체 학생의 10% 미만이었다.
이런 조직에 들어 있는 운동권 가운데 1학년을 제외하고 2∼4학년 학생들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인식론, 변증법, 자본론 해설판, 서양 경제사 등 좌파적 철학과 경제학, 경제사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그렇게 됐다.
그건 이상하지 않았다.
진중권이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로 그때는 그게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진보적'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지진아' 취급받았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대학가 운동권을 휩쓸었다.
술집에서 '위수김'을 주저 없이 외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
주체사상 관련 책을 읽고는 감동하는 운동권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했다.
정통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본의 독점과 착취는 가진 자들을 더욱 부자로, 못 가진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확실해 보였으니 그럴만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상당수의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경도됐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를 지낸 권영길은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빨치산으로 숨진 아버지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기에 이들 운동권에 '멘붕'이 왔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일제히 무너지고, 북한의 경제도 남한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꿈꿨던 세상이 허상임이 드러난 것이다.
주사파 대부 김영환도 [삶] 인터뷰에서 자기 인생 최대의 역경을 그때로 꼽았다.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가슴에 담았던 사람들을 지금 시점에서 비난할 수는 없다.
자기들 인식의 범위에서는 최대한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기 삶이 얼마나 고단할 것인지 알면서도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가고자 했다.
고시나 취업을 통해 편한 삶을 살수도 있지만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 그들은 20대 초반의 나이여서 세상에 대한 시야가 좁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그런 판단의 오류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이 확실히 무너졌던 1990년 이후에도 사상의 변화가 없다면 지적으로 게으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역사가 내부 속까지 까뒤집어 보여준 상황인데도 사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챌 수 없고, 반성할 수 없다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과거의 일에 대해 반성하는 운동권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본인의 양심에 따라 반성했다.
그랬더니 과거 운동권들의 상당수가 그들을 변절자라고 욕했다.
김영환은 본인뿐 아니라 부인마저 외톨이가 됐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최종 목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였기에 과거 학생운동 경력을 지나치게 훈장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다음은 지난 1년간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이들의 발언 내용을 묶은 것이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인터뷰]
-- 대학교 운동 서클(동아리)에는 스스로 들어갔나.
▲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포스터를 보고 고전연구회에 들어갔다.
자발적으로 갔다.
운동서클인지 모르고 들어갔지만 금방 운동서클인 것을 알았다.
어차피 시위에 참여할 생각이 있었기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 주체사상 학습서라는 '강철서신'은 북한 방송을 듣고 썼나.
▲ 그렇지 않다.
방송을 듣기 전에 썼다.
강철서신에는 주체사상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강철서신이 북한 방송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북한 방송을 꾸준히 들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강철서신은 주로 나의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 주체사상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선배들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때 북한은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면서 북한을 빼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손을 잡든지, 아니면 북한을 대체해야 하든지 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결국,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 있던 관변 단체들의 자료를 열람하다 북한, 소련, 동유럽을 전공하는 연구자들만이 볼 수 있는 자료집을 구해 읽었다.
레닌과 스탈린, 김일성, 김정일 이름으로 된 글들이 거기에 있었다.
도움이 됐다.
-- 주로 들었던 북한 방송은 무엇인가.
▲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한 방송을 들었는데, 구국의 소리 방송은 뻔하고 식상했다.
평양방송 중 김일성방송대학이라고 있었는데, 깊이가 있는 내용도 나왔다.
남한의 혁명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었다.
-- 인생에서 역경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989년 전후가 가장 큰 역경이었다.
나는 투철한 사회주의 운동가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그 신념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전에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정신적) 동요가 엄청나게 심해졌고 루마니아가 붕괴하면서 극단적 상태로 갔다.
당시 우리는 사회주의가 흔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이었던 루마니아는 건재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는데, 그 나라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무너졌다.
-- 북한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 실태가 참혹했다.
어마어마한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체제를 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 김영환이 변절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상황과 생각이 변했는데도 오히려 그걸 감추고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게 변절이다.
그들이 세계 변화나 문명 발전에 눈을 열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새 시대에 발맞춰 가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인터뷰]
-- 학부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나.
▲ 작은 지하 서클에 들어갔다.
중요한 멤버는 아니었고 주변인 정도였다.
나는 서클 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선배들이 보안 유지를 위해 가짜 이름을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하 서클의 핵심 멤버는 아니지만 시위에는 모두 참여했다.
-- 대학원 생활은 어떠했나.
▲ 군대를 마친 후에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조직 운동을 열성적으로 했다.
그때는 지하당을 만들자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 한 곳에 들어가 활동했는데, 조직이 무너졌다.
조직원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잇따라 체포됐다.
나도 구속될 줄 알고 기다렸지만 나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다.
-- 대학 시절 사회주의를 지향했나.
▲ 그렇다.
그때에는 그게 시대정신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독일에 가서 보니 유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유럽 모델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개념이 결합하는 시스템이다.
독일의 경우 유치원부터 대학 박사과정까지 학비가 무료다.
외국인 아이들한테도 아동수당을 준다.
-- 북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북한은 봉건왕조다.
대학 다닐 때부터 우리(PD·민중민주계열)는 정통을 지향했다.
자본론도 읽었다.
그러나 저쪽(NL·민족해방계열)은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게 우민화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시키고 각성시키는 것이며, 노동자들을 인텔리로 만드는 것이다.
NL은 멀쩡한 인텔리마저도 우매한 대중으로 만든다.
북한은 말도 안 되는 체제다.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대표]
-- 사회주의를 지향한 적은 없나.
▲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배운 것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에 빠진 적은 없다.
사회주의는 개인적으로 공부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도 경도된 적이 없다.
주체사상을 읽어봤는데, 10페이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의 동년배 운동권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주체사상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사람이다.
--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한다.
다 같이 잘살게 하자는 취지다.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 잘사는 나라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회경제 시스템을 지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북한을 굉장히 좋게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반대했는데, 김일성은 더 장기 집권하는 것 아니냐"고 선배들에게 따지곤 했다.
진보정당에 있는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 간첩 이선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 이선실 사건은 1992년 발표됐다.
그는 내가 일하던 민중당 사무실에 와서는 환심을 사기 위해 복사기를 사줬다.
당시 복사기는 드물었고 비싼 것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 찾아와 100만 원을 줬고, 민중당 사무실 근처 다방에서 30만 원을 건넸다.
그러더니 고향인 제주도에 아들이 살고 있는데, 그곳으로 돌아간다면서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빼낸 전세보증금 4천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진보적 정당운동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아들 집 옆에 집을 사서 거주하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나에게 돈을 주려 했고,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 그가 대화 중에 김일성을 언급했다고 했는데.
▲ 이선실이 한번은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김일성 주석께서 장 선생을 굉장히 좋아하신다.
김 주석의 뜻을 받들어서 통일운동을 함께 열심히 하자"고 말했다.
당시는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뒤여서 주사파가 극성을 부릴 때였다.
이선실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가 간첩이라는 생각을 못 했다.
[권영길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 이사장]
-- 학창 시절에 독서는 많이 했나.
▲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도서반을 지원했고 독서에 몰두했다.
주로 사회과학책을 읽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었다.
나는 이 비판서들을 읽으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부산의 다른 고교 학생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조직하고 야학도 운영했다.
--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아버지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북으로 철수할 때 지리산에 들어가셨는데. 구체적 상황은 모른다.
아버지는 생전에 마을 이장을 했고 초등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셨다.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주변 마을 할머니들이 초등학교 시절 때 나를 만나면 "너의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한 분이었다, 생각 바르고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전하곤 했다.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대표]
-- 대학교에 가자마자 학생운동을 시작했나.
▲ 학교 자연대 게시판에 '과학세대'라는 학내 잡지의 편집실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봤다.
그 편집실에 찾아갔더니 선배들은 내가 감당이 안 된다면서 한 서클을 소개해줬다.
자연대 지하서클이었다.
-- 대학 지하 서클에서 무슨 공부를 했나.
▲ 처음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을 읽었고 1학년 말쯤에는 마르크스주의, 소외론, 경제학, 경제사 등을 읽었다.
관련 철학책도 봤다.
-- 사회주의 공부를 한 것인가.
▲ 그렇다.
-- 주체사상 공부는 하지 않았나.
▲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주체사상을 공부하지 않았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원주 교도에서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86년 말이 되니 주체사상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그런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나에게 "형은 출소하면 교육 대상"이라고 했다.
주체사상을 모르니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 1980년대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사회주의 건설이어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보기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는데.
▲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사상을 가진 상태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1987년까지 김영삼ㆍ김대중 중심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민주의자, 미국식 자본주의자 등 여러 분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소련, 중국,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기에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면 이상적 사회가 실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정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사회주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
▲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위적으로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면 부작용이 발생해 사람들한테 더 큰 피해를 준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서 평균적인 삶을 만들고, 그런 제도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 586 운동권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는 게 정상이다.
20대에 가졌던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더는 내가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성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생각을 바꿔보기를 바란다.
자기가 주변으로부터 왕따 될까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후손을 위한 길이다.
--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나.
▲ 나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사회주의가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수십억 명 중 한 명이었다.
진짜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사회과학 공부는 언제 했나.
▲ 70년대 학생운동은 유신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등의 순진한 수준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복학하고 나니 학생운동이 확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이 레닌 저작물을 읽기도 했다.
이념적 성향이 강해져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배웠다.
징역을 살고 나온 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독서량이 풍부했다.
나는 온건하고 소극적인 편이었다.
따라가는 편이었지 리드하는 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후배들이 나를 능력 있는 선배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 노동해방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해 작은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내 생애에 불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공개적으로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아직은 사회주의 안에 많이 있다고 본다.
기존의 동부 유럽이나 소련, 북한, 중국 등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들을 뛰어넘는 사회주의가 가능하면 좋겠다.
/연합뉴스
과거 사상 반성한다는 이유로 변절자라 욕하는 것은 문제 "위수김"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허름한 술집에서 막걸리 사발을 들고 '위수김'을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더니 답변은 놀라웠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위하여"라고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기본 조직은 서클(동아리)과 학과 학회로 이뤄졌다.
서클 중에는 이름이 없는 지하서클도 있었는데, 소규모이고 전투적이었다.
서클과 학회에 가입해서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을 조직화한 운동권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전체 학생의 10% 미만이었다.
이런 조직에 들어 있는 운동권 가운데 1학년을 제외하고 2∼4학년 학생들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인식론, 변증법, 자본론 해설판, 서양 경제사 등 좌파적 철학과 경제학, 경제사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그렇게 됐다.
그건 이상하지 않았다.
진중권이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로 그때는 그게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진보적'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지진아' 취급받았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대학가 운동권을 휩쓸었다.
술집에서 '위수김'을 주저 없이 외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
주체사상 관련 책을 읽고는 감동하는 운동권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했다.
정통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이 정의롭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본의 독점과 착취는 가진 자들을 더욱 부자로, 못 가진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확실해 보였으니 그럴만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상당수의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경도됐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를 지낸 권영길은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빨치산으로 숨진 아버지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기에 이들 운동권에 '멘붕'이 왔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일제히 무너지고, 북한의 경제도 남한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꿈꿨던 세상이 허상임이 드러난 것이다.
주사파 대부 김영환도 [삶] 인터뷰에서 자기 인생 최대의 역경을 그때로 꼽았다.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가슴에 담았던 사람들을 지금 시점에서 비난할 수는 없다.
자기들 인식의 범위에서는 최대한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기 삶이 얼마나 고단할 것인지 알면서도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가고자 했다.
고시나 취업을 통해 편한 삶을 살수도 있지만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 그들은 20대 초반의 나이여서 세상에 대한 시야가 좁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그런 판단의 오류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이 확실히 무너졌던 1990년 이후에도 사상의 변화가 없다면 지적으로 게으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역사가 내부 속까지 까뒤집어 보여준 상황인데도 사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챌 수 없고, 반성할 수 없다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과거의 일에 대해 반성하는 운동권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본인의 양심에 따라 반성했다.
그랬더니 과거 운동권들의 상당수가 그들을 변절자라고 욕했다.
김영환은 본인뿐 아니라 부인마저 외톨이가 됐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최종 목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였기에 과거 학생운동 경력을 지나치게 훈장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다음은 지난 1년간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이들의 발언 내용을 묶은 것이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인터뷰]
-- 대학교 운동 서클(동아리)에는 스스로 들어갔나.
▲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포스터를 보고 고전연구회에 들어갔다.
자발적으로 갔다.
운동서클인지 모르고 들어갔지만 금방 운동서클인 것을 알았다.
어차피 시위에 참여할 생각이 있었기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 주체사상 학습서라는 '강철서신'은 북한 방송을 듣고 썼나.
▲ 그렇지 않다.
방송을 듣기 전에 썼다.
강철서신에는 주체사상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강철서신이 북한 방송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북한 방송을 꾸준히 들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강철서신은 주로 나의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 주체사상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선배들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때 북한은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면서 북한을 빼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손을 잡든지, 아니면 북한을 대체해야 하든지 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결국,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 있던 관변 단체들의 자료를 열람하다 북한, 소련, 동유럽을 전공하는 연구자들만이 볼 수 있는 자료집을 구해 읽었다.
레닌과 스탈린, 김일성, 김정일 이름으로 된 글들이 거기에 있었다.
도움이 됐다.
-- 주로 들었던 북한 방송은 무엇인가.
▲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한 방송을 들었는데, 구국의 소리 방송은 뻔하고 식상했다.
평양방송 중 김일성방송대학이라고 있었는데, 깊이가 있는 내용도 나왔다.
남한의 혁명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었다.
-- 인생에서 역경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989년 전후가 가장 큰 역경이었다.
나는 투철한 사회주의 운동가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그 신념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전에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정신적) 동요가 엄청나게 심해졌고 루마니아가 붕괴하면서 극단적 상태로 갔다.
당시 우리는 사회주의가 흔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이었던 루마니아는 건재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는데, 그 나라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무너졌다.
-- 북한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 실태가 참혹했다.
어마어마한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체제를 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 김영환이 변절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상황과 생각이 변했는데도 오히려 그걸 감추고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게 변절이다.
그들이 세계 변화나 문명 발전에 눈을 열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새 시대에 발맞춰 가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인터뷰]
-- 학부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나.
▲ 작은 지하 서클에 들어갔다.
중요한 멤버는 아니었고 주변인 정도였다.
나는 서클 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선배들이 보안 유지를 위해 가짜 이름을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하 서클의 핵심 멤버는 아니지만 시위에는 모두 참여했다.
-- 대학원 생활은 어떠했나.
▲ 군대를 마친 후에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조직 운동을 열성적으로 했다.
그때는 지하당을 만들자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 한 곳에 들어가 활동했는데, 조직이 무너졌다.
조직원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잇따라 체포됐다.
나도 구속될 줄 알고 기다렸지만 나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다.
-- 대학 시절 사회주의를 지향했나.
▲ 그렇다.
그때에는 그게 시대정신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독일에 가서 보니 유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유럽 모델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개념이 결합하는 시스템이다.
독일의 경우 유치원부터 대학 박사과정까지 학비가 무료다.
외국인 아이들한테도 아동수당을 준다.
-- 북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북한은 봉건왕조다.
대학 다닐 때부터 우리(PD·민중민주계열)는 정통을 지향했다.
자본론도 읽었다.
그러나 저쪽(NL·민족해방계열)은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게 우민화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시키고 각성시키는 것이며, 노동자들을 인텔리로 만드는 것이다.
NL은 멀쩡한 인텔리마저도 우매한 대중으로 만든다.
북한은 말도 안 되는 체제다.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대표]
-- 사회주의를 지향한 적은 없나.
▲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배운 것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에 빠진 적은 없다.
사회주의는 개인적으로 공부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도 경도된 적이 없다.
주체사상을 읽어봤는데, 10페이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의 동년배 운동권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주체사상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사람이다.
--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한다.
다 같이 잘살게 하자는 취지다.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 잘사는 나라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회경제 시스템을 지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북한을 굉장히 좋게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반대했는데, 김일성은 더 장기 집권하는 것 아니냐"고 선배들에게 따지곤 했다.
진보정당에 있는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 간첩 이선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 이선실 사건은 1992년 발표됐다.
그는 내가 일하던 민중당 사무실에 와서는 환심을 사기 위해 복사기를 사줬다.
당시 복사기는 드물었고 비싼 것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 찾아와 100만 원을 줬고, 민중당 사무실 근처 다방에서 30만 원을 건넸다.
그러더니 고향인 제주도에 아들이 살고 있는데, 그곳으로 돌아간다면서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빼낸 전세보증금 4천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진보적 정당운동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아들 집 옆에 집을 사서 거주하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나에게 돈을 주려 했고,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 그가 대화 중에 김일성을 언급했다고 했는데.
▲ 이선실이 한번은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김일성 주석께서 장 선생을 굉장히 좋아하신다.
김 주석의 뜻을 받들어서 통일운동을 함께 열심히 하자"고 말했다.
당시는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뒤여서 주사파가 극성을 부릴 때였다.
이선실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가 간첩이라는 생각을 못 했다.
[권영길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 이사장]
-- 학창 시절에 독서는 많이 했나.
▲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도서반을 지원했고 독서에 몰두했다.
주로 사회과학책을 읽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었다.
나는 이 비판서들을 읽으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부산의 다른 고교 학생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조직하고 야학도 운영했다.
--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아버지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북으로 철수할 때 지리산에 들어가셨는데. 구체적 상황은 모른다.
아버지는 생전에 마을 이장을 했고 초등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셨다.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주변 마을 할머니들이 초등학교 시절 때 나를 만나면 "너의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한 분이었다, 생각 바르고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전하곤 했다.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대표]
-- 대학교에 가자마자 학생운동을 시작했나.
▲ 학교 자연대 게시판에 '과학세대'라는 학내 잡지의 편집실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봤다.
그 편집실에 찾아갔더니 선배들은 내가 감당이 안 된다면서 한 서클을 소개해줬다.
자연대 지하서클이었다.
-- 대학 지하 서클에서 무슨 공부를 했나.
▲ 처음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을 읽었고 1학년 말쯤에는 마르크스주의, 소외론, 경제학, 경제사 등을 읽었다.
관련 철학책도 봤다.
-- 사회주의 공부를 한 것인가.
▲ 그렇다.
-- 주체사상 공부는 하지 않았나.
▲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주체사상을 공부하지 않았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원주 교도에서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86년 말이 되니 주체사상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그런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나에게 "형은 출소하면 교육 대상"이라고 했다.
주체사상을 모르니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 1980년대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사회주의 건설이어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보기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는데.
▲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사상을 가진 상태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1987년까지 김영삼ㆍ김대중 중심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민주의자, 미국식 자본주의자 등 여러 분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소련, 중국,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기에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면 이상적 사회가 실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정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사회주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
▲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위적으로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면 부작용이 발생해 사람들한테 더 큰 피해를 준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서 평균적인 삶을 만들고, 그런 제도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 586 운동권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는 게 정상이다.
20대에 가졌던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더는 내가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성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생각을 바꿔보기를 바란다.
자기가 주변으로부터 왕따 될까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후손을 위한 길이다.
--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나.
▲ 나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사회주의가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수십억 명 중 한 명이었다.
진짜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사회과학 공부는 언제 했나.
▲ 70년대 학생운동은 유신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등의 순진한 수준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복학하고 나니 학생운동이 확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이 레닌 저작물을 읽기도 했다.
이념적 성향이 강해져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배웠다.
징역을 살고 나온 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독서량이 풍부했다.
나는 온건하고 소극적인 편이었다.
따라가는 편이었지 리드하는 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후배들이 나를 능력 있는 선배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 노동해방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해 작은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내 생애에 불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공개적으로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아직은 사회주의 안에 많이 있다고 본다.
기존의 동부 유럽이나 소련, 북한, 중국 등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들을 뛰어넘는 사회주의가 가능하면 좋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