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투리에 온전한 자유를 주라
“가우, 가새, 고새, 가시개~.”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이다. 언어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꽤 인상 깊었을 듯싶다. ‘우리 동네는 깍개라고 했는데, 가쇠라고 했지, 아녀 가셍이라고 했어’라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아쌀하게 붙어 부러!” 영화 황산벌은 포스터부터 아쌀했다. 연기라면 멱살을 잡는다는 이병헌이 출연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나가 오늘 무사 이추룩 손님이 없나 해서.” 셋 다 절절하기가 무량수전이다.

하지만 여러 층위와 모호한 경계로 혼돈 그 자체인 언어 복잡계에서 방언, 사투리는 서자(庶子) 취급을 받고 있다. 표준어의 잘못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표준어가 자기 땅켜를 가진 만큼 사투리도 자기 구름층을 내려깔고 있다. 무 자르듯 깍뚝썰기로 요리할 순 없다. 표준어 정책을 찬찬히 재고해야 할 이유다.

서울말도 표준어 이전엔 지역어

표준어라는 개념은 근대국가 성립 시기에 등장했다. 한국 표준어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1912년 보통학교 언문철자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경성말(서울말)’을 명문화했다. 이 ‘표준어’는 일본 영문학자 오카쿠라 요시사부로가 ‘standard language’를 번역해 사용한 것을 재수입한 것이다. 1933년 맞춤법통일안에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못 박았다. 새겨야 할 것은 서울말도 방언의 하나라는 점이다.

비표준어라는 말에는 편견이 담겨 있다. 잘못된 말, 쓰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족쇄다. 국어기본법은 공문서와 교과서엔 반드시 표준어를 쓰도록 명시했다. 언론과 방송에도 표준어 확산에 책임을 지웠다. ‘택도 없다’를 ‘턱도 없다’로 고쳐 쓸 때마다 기자가 고민에 빠지는 연유다. 택도 없다는 경상, 전라, 함경 방언이다.

본질적으로 쓰지 못할 말은 없다. 말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규범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까칠한 금자씨’를 ‘까다로운 금자씨’로 무던히 고친 시절이 있었다. ‘성격이 부드럽지 못하고 어딘가 모난’이라는 뜻을 가진 표준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까칠하다’는 ‘까다롭다’의 잘못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다.

표준어만이 전가의 보도인 양 대접하는 현실을 파편해야 한다. 표준어는 전보(電報) 시절의 소통 산물이다. 지금은 뱅크런조차 손가락 끝에서 순식간에 이뤄지는 시대다. 문해력이 문제지 지역·시간 제약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투리를 공문서와 교과서에 못 쓰는 것은 그렇다 쳐도 언론과 방송에서 재갈을 물리는 것은 가혹하다.

우리말 원류 방언 회생정책 펴야

이렇게 재갈 물린 사이 수많은 사투리가 사멸했다. 제주 방언은 이젠 소수 노인층에서 쓰는 언어로 전락했다. 2020년 국립국어원 조사 결과 국민의 사투리 사용 비중은 43.3%였다. 2005년 52.4%에서 15년 만에 9.1%포인트 줄었다. 20대는 훨씬 낮은 31.6%였다.

사투리는 한국어의 원류다.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제2외국어까지 공부하는 마당에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국어 과목에 ‘문학’처럼 한 자리 마련하자. 제주특별자치도는 2007년 ‘제주어 보정 및 육성 조례’를 제정한 뒤 ‘제주어표기법’을 확정하고 제주어 보존·확산에 힘을 쏟고 있다.

“어쩐지 마음이 언니가 뽀땃하게 끓여 온 전복죽처럼 뽀땃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저 ‘뽀땃’을 대체할 표준어가 있을까.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있는 말이라도 오롯이 쓰면 한국어 어휘의 빈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