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향기, 자연의 아취 은은한 구례 3대 고택

둘레가 팔백여 리에 이르는 지리산 자락에는 한국인의 삶이 깃들어 있다.

노고단에서 가장 가까운 시가지인 구례에서는 선인들의 자취가 서린 전통 가옥들이 현대인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구례 3대 고택'으로 불리는 운조루, 쌍산재, 곡전재이다.

운치 있는 풍광에 둘러싸인 명가들이다.

특히 운조루, 쌍산재는 이웃과 고락을 나누는 배려와 나눔의 정신이 돋보인다.

[imazine] 지리산을 부탁해·지리산아 부탁해 ②
◇ 나눔과 여성 존중의 표상…운조루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인 운조루와 곡전재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다.

두 고택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0∼200m.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오미마을은 한국의 3대 명당이라고 하는 금환락지에 해당한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의 땅이라는 뜻이다.

'구만들'이라고 불리는 구례 들판에 자리 잡은 오미리는 지리산 일대에 홍수나 가뭄이 들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풍요의 땅이다.

오미리는 지리산 둘레길에 있는 마을 중 문화재가 가장 많으며 이순신 백의종군로 등 다양한 도보 여행길이 교차한다.

자연, 역사와 호흡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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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에 낙안 군수를 지냈던 류이주(1726∼1797)가 지은 400년 고택이다.

전라도 지역에는 '-'자 혹은 'ㄱ'자 형 안채가 많으나 운조루는 'ㄷ'자 형 안채와 '丁'자 사랑채를 포함해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 형식이다.

이는 류이주의 고향이 경상북도 안동이었던 데서 비롯됐다.

경상도 지역에는 'ㅁ'자 형 가옥이 주류였다.

부속 채까지 아울러 흔히 '아흔아홉 칸' 집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73칸이 남아있으며 집터는 710평 정도이다.

국가 지정 문화재인 운조루에는 눈여겨볼 점이 네댓 가지에 이른다.

인구에 주로 회자하는 것이 타인능해(他人能解 누구나 열 수 있다)라는 글귀가 붙은 쌀 뒤주이다.

가난한 이웃들이 주인 얼굴을 대하지 않고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지점에 놓아두었다.

통나무를 잘라 속을 비워 만든 이 뒤주에는 쌀이 약 두 가마니 반 들어가는데 운조루 1년 소출의 약 20%인 서른여섯 가마니를 나눔의 용도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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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 서쪽 끝에는 가빈터가 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모셔두는 곳이다.

전국 각지에 부음을 전하고 문상객이 장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장례 기간을 최대 90일 정도로 설정한 데서 연유한 시설이다.

현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례 방식이지만,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학에서 강조했던 효 정신이 읽힌다.

'여자들의 사랑방'을 들어본 적 있는가.

운조루에는 선비들이 썼던 사랑채와 함께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안 사랑채가 있었다.

안 사랑채는 사랑채와 대등한 위치에 좌우로 배치됐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여성들을 위한 공간은 또 있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인들이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든 다락이다.

다락에 오르면 오미마을이 마주하고 있는 오봉산이 정면으로 내다보인다.

오봉산은 높지 않지만, 다섯 개의 봉우리가 좌우로 길게 늘어서 정취가 흐른다.

다락 앞에는 현대의 발코니에 해당하는 좁은 통로가 설치돼 있어 운치를 더한다.

운조루의 굴뚝은 낮게 깔려 있다.

밥 지을 때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배곯는 이웃의 괴로움을 더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사랑채에 딸린 누각의 이름이 운조루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雲無心以出岫)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鳥倦飛而知還)'의 첫 두 글자인 운(雲), 조(鳥)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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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하고 정겨운 정원…곡전재

곡전재는 1929년에 나무로 지은 전통 한옥이다.

금환락지를 형상화한 타원형의 돌담이 정겹다.

원래 6채 53칸 규모로 지어졌으나 현재 5채 51칸이다.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 형이다.

처마 서까래의 끝에 짧은 서까래를 한 번 더 얹은 부연이 인상적이었다.

마을을 지나는 내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은 차분한 정원의 정취를 더한다.

◇ 소쇄원을 떠올리는 자연 정원 속 쌍산재

전라남도 담양 소쇄원이 한국의 민간 정원 중 최고로 꼽히는 것은 인공과 자연의 조화 때문이다.

정자들이 계곡, 숲, 언덕 등 자연을 거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여 정원의 일부로 삼았다.

쌍산재는 소쇄원을 떠올린다.

그만큼 사람의 거주 공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소쇄원이 별장이고, 쌍산재는 대가족이 살았던 저택이라는 점이 다르다.

쌍산재는 고택이지만 전통적인 사대부 가옥과는 구조가 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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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에 있는 쌍산재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채, 사랑채, 사당 등 주된 건물이 바로 나온다.

그러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짙은 대나무 숲 사이로 좁게 난 돌계단이다.

대나무 숲은 야생 차나무와 어우러져 있었고 계단 돌의 마모된 모서리는 고택이 견딘 150여 년의 세월을 대변했다.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가니 넓은 잔디와 숲이 나타났다.

정원과 별서들이 배치된 공간이다.

별채, 호서정, 서당채, 경임당 등의 별서 중 으뜸은 학동들을 가르치던 장소인 서당채였다.

이 집의 자재와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서당채의 이름이 쌍산재이다.

'쌍산'은 이 집을 지은 선조의 호이다.

17,700㎡의 부지 위에, 100여 종의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는 쌍산재는 전남 민간정원 5호로 지정돼 있다.

정원만큼 돋보이는 곳이 쌍산재에는 둘 더 있다.

하나는 안채 옆에 붙은 쌀 뒤주이고, 다른 하나는 대문 바깥에 있는 당몰샘이다.

뒤주는 가난한 이웃이 자유롭게 쌀을 꾸어가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쌀을 가져간 마을 주민은 빌려 간 양만큼 도로 갖다 놓으면 된다.

꾸어간 쌀이 돌아오지 못해 뒤주가 비면 주인이 채워 다른 이웃들이 쌀을 가져갈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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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몰샘은 쌍산재의 샘이다.

7년 가뭄, 3년 장마에도 수위가 일정한 이 샘의 물은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상사마을이 장수촌으로 소문난 것도 지리산 약초 성분이 녹아있는 이 샘물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몰샘은 원래 쌍산재 담 안쪽에 있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물을 자유롭게 떠 갈 수 있게 담의 위치를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지금 샘은 담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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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위쪽에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 甘露靈泉) 이라는 문구가 있다.

오래된 마을의 이슬처럼 달콤하고 신령스러운 샘물이라는 뜻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