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숙 대표 14년 동안 책방 운영…문화기획 활동도 병행
[인천책방] ⑦고양이 사장님의 무인서점…배다리 '나비날다'
[※편집자 주 = 동네책방은 책을 유통하고 공급하는 본연의 기능뿐 아니라 누구나 푸근하게 머물며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정서적 안식처 역할도 합니다.

연합뉴스는 300만 시민이 살아가는 인천이라는 삶의 공간에서 정겨운 문화활동 주체로서 명맥을 이어가는 동네서점과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모두 10편으로 구성된 이번 기사는 매주 토요일 1편씩 송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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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책방] ⑦고양이 사장님의 무인서점…배다리 '나비날다'
동인천역 인근 철교 밑을 지나면 곧바로 '배다리' 골목이 이어진다.

1970년대에 헌책방만 40곳이나 몰려 있어 한때는 수도권에서 유명한 거리였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동성한의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2층짜리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1973년에 지어진 낡은 상가였다.

간판만 보고는 순간 책방이 아니라 한의원에 "잘못 찾아왔나" 싶을 수 있다.

한의원 간판 왼쪽에 '문화상점'이라고 적힌 작은 금빛 팻말과 그 아래 '나비날다 책방'이라는 글씨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녹색 나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연세 지긋하신 한의사가 아니라, 배가 불룩한 고양이 한 마리가 반겼다.

귀를 쫑긋 세운 고양이는 책방 주인 대신 의자에 앉아 웅크린 몸을 펴며 태연하게 손님을 맞았다.

뒤늦게 가게에 나타난 실제 책방 주인은 자신을 "고양이 모시는 집사"라고 소개했다.

이어 "여긴 고양이 '반달이'가 사장님인 무인 서점이에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 환경단체 활동하다 배다리와 인연…2009년 첫 헌책방 개업
[인천책방] ⑦고양이 사장님의 무인서점…배다리 '나비날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권은숙(57·여) 나비날다 대표는 6살 때 직장을 옮긴 부모를 따라 인천에 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에 있는 전자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다 특허 기술 개발 연구소로 이직하며 상경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꽃다운 20∼30대를 다 보낸 그는 서울에 있는 작은 환경단체 회원으로 5년 넘게 활동했고, 이후 1년은 상근 활동가로 각종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2000년대 초반 천성산 살리기와 새만금 개발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경남 양산과 전북 부안에서는 지역 주민들과 살을 부대끼며 연대의 가치를 배웠다.

권 대표는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동네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내는 '마을 살이'를 한다"며 "그 과정에서 환경 운동에 쓰던 에너지를 지역 문화 활동에 한번 써 보자고 마음먹었다"고 떠올렸다.

그가 인천 배다리와 연이 닿은 것은 2000년대 중반 '산업도로 건설 반대' 운동을 함께 하면서부터다.

이후 2009년 배다리 골목 입구에 23㎡짜리 헌책방 '나비날다-책 쉼터'를 처음 열었다.

처음부터 책을 팔지는 않았다.

환경·인권·평화 등 평소 관심을 두던 주제의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누구나 와서 편하게 쉬면서 볼 수 있게 했다.

책방 이름에 굳이 '책 쉼터'라는 단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권 대표는 "책방을 운영한다는 생각보다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어떤 문화 공간을 운영해 보고 싶었다"며 "책이 좋다고 '팔라'는 손님이 늘고 '못 판다'고 실랑이하다가 결국 책을 공유하는 가치를 알게 되면서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 헌책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새 책 판매…14년 동안 직접 책 선정
[인천책방] ⑦고양이 사장님의 무인서점…배다리 '나비날다'
권 대표는 회원들의 기증 도서를 포함해 300∼400권으로 헌책방을 운영했지만 개점 3년만인 2012년에는 새 책을 파는 독립서점으로 방향을 바꿨다.

헌책을 구하려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해 시간이 많이 들고, 헌책 여러 권을 들고 와서 팔겠다는 손님에게 일부만 사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보니 헌책방 운영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헌책방은 창고가 커야 책을 많이 쌓아둘 수 있고 수익도 많이 낼 수 있다"며 "여러가지 불편과 한계를 느꼈고, 큰 자본으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책 공간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아 헌책방 대신 새 책을 파는 서점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그해 배다리 입구에 있는 옛 조흥상회 건물 1층으로 이사한 나비날다 책방은 무인 서점이자 배다리 안내소 역할을 했다.

골목 입구에 있다 보니 배다리를 찾은 관광객들은 으레 이 책방부터 들렀고, 권 대표는 가끔 책방에 있다가 "벽화건물은 어디 있느냐. 커피숍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는 손님들의 물음에 답하다 보니 어느새 관광 안내소가 됐다.

2009년 첫 헌책방과 2012년 두 번째 서점에 이어 2021년에는 지금의 '동성한의원' 건물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공간은 달랐어도 권 대표가 좋아하고 팔고 싶은 책을 선정하는 '큐레이션' 역할을 하며 14년간 책방지기 자리를 지킨 것은 다르지 않다.

헌책방을 운영할 때는 나이가 많은 손님이 대부분이었지만 새 책을 팔고부터는 고객층이 훨씬 젊어졌다.

남인천여중에 다니는 정주현(16)양은 "헌책 두권을 내고 지역 도서관이 기획한 '배다리 책사랑 일일 화폐' 5천원권을 받았다"며 "나비날다 책방에 좋은 책이 많다는 추천을 받고 일일 화폐를 쓰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했다.

◇ "함께 나누고 저를 비울 때 얻는 즐거움 커"
[인천책방] ⑦고양이 사장님의 무인서점…배다리 '나비날다'
인터넷으로 편하게 새 책과 헌책을 사고파는 요즘 권 대표도 '동네 책방이 큰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책만 팔아서는 가게 월세도 내기 어렵다.

그는 플리마켓(벼룩시장)이나 둘레길 탐방과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손수 기획하고 '생활문화공간달이네'라는 문화기획 단체도 운영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맡긴 책방을 무인으로 운영하면서 틈틈이 문화기획으로 번 돈으로 책방 월세도 내고 새 책도 산다.

책방에서 '북 토크'를 열어 독자와 작가의 만남을 주선하고, 몇 년째 단편 소설 공모전을 기획하는 작업은 아무런 수익 없이 온전히 그의 개인 돈으로 하는 일이다.

권 대표는 책방뿐만 아니라 고양이 다섯 마리의 보금자리인 단독 주택과 미추홀구 수봉산 꼭대기 집의 월세도 내야 한다.

수봉산 아래 주택은 권 대표 혼자 사는 곳이지만 비워두는 낮에는 행인이나 독서클럽 회원들이 들러 잠깐 쉬거나 모임을 할 수 있게 언제든 대문을 열어둔다.

그는 "제가 가진 게 없다"며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적게나마 서로 가진 걸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에야 권 대표가 책방 이름을 나비날다로 지은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나비날다의 '나비'는 나눔과 비움의 줄임말"이라며 "함께 나누고 저를 비울 때 얻는 즐거움은 정말 크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배다리 골목에서 자신의 이름보다는 활동명 '청산별곡'으로 더 유명하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의 첫 소절이다.

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던 그는 "앞으로 언제까지 책방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은 없다"면서도 "청산별곡의 가사처럼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책방] ⑦고양이 사장님의 무인서점…배다리 '나비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