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거리
맨해튼-거리
아내가 일찍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강아지와 함께 동네 산책을 나간다. 얼마 전만 해도 반팔 차림으로 집을 나섰는데, 며칠 사이에 가을은 잊히고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겨울이 찾아온 듯 날씨가 쌀쌀해졌다. 옷차림을 후회하며 벌벌 떨다 돌아온 다음 날 아침이면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 위로 성에가 낯선 얼굴을 한 채 내려앉아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건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한 여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비의 낭만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비 올 때 외출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데 얼마전 폭우가 쏟아졌다. 한국에서 소식을 접한 지인들이 괜찮냐는 안부를 물어왔다. 뉴스 내용 그대로 맨해튼은 ‘물폭탄’을 맞았다. 금요일이 정점이었다. 어느 지하철 역 벽에서는 마치 소화전이 터진 듯 분수처럼 물이 뿜어져 나왔고, 침수된 철로 구간들도 생겼다. 한강이 된 도로를 지나던 버스 안으로 물이 들어와 황급하게 의자 위로 발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의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탔다. 이날 낮에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진 비 때문에 도시는 고장 난 나침반처럼 멈췄다. (참고로 1904년에 첫 개통한 뉴욕 지하철은 120년이라는 세월만큼 시설이 낙후되었다. 지하철만 보자면 이런 후진국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관리도 엉망이고 지저분하다)

14년 전 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New York Classical Players-NYCP)라는 이름으로 챔버 오케스트라를 시작했다. 그때는 뉴욕에 살아본 적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하고 나면, “그럼 돈은 어디서….”라는 또 다른 질문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핼러윈에 음악회 열었더니...다 완벽했지만 객석은 텅 비었다

창단 첫 해부터 이름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할 기회들이 많았다. 그때 인연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실 돈도 인맥도 없이 시작한 일이다. 그래서 재벌집 아들이 아니냐는 엉뚱한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지금까지 200회가 넘는 콘서트를 열고 있지만 기억을 몽땅 도난당했으면 좋겠다고 바랄 만큼 어이없는 일들이 시간을 할퀴며 지나갔다.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주말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시작할 때부터 화난 사람처럼 찌푸렸던 날씨가 리허설을 마칠 무렵이 되자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새내기 대학생 시절 영어교재에 등장했던 ‘The Show Must Go On!’을 떠올리며 관객을 위해서라면 궂은 날씨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연주를 준비했다.

당일 아침, 집안의 고요함을 잡아 삼킬 듯 창 밖에는 거친 눈보라가 몰아쳤다. 콘서트는 고사하고 당장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위급 상황이었다. 눈이 많이 올 거라는 뉴스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록적인 눈폭풍 ‘니모’는 이때 14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10여 년 전 맨해튼에서 강을 건너 동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퀸즈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렵게 초청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그 연주는 훌륭한 음향으로 잘 알려진 한 대학교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다행히 날씨도 좋아 천재지변의 염려도 없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무대로 입장하는 문이 두둥 열리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기분 나쁜 예상은 왜 틀리지 않는 것일까. 객석에는 몇 명의 관객 만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느긋하고 유연한 얼굴로 인사를 했지만 냉랭한 박수를 뒤로한 채 황급히 포디움에 올라 휙 돌아섰다. 머리는 복잡하고 가슴은 쓰렸다. 이번에는 날짜가 문제였다. ‘음악회를 핼러윈 데이로 잡다니…’ 100% 내 실책이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에 NYCP의 이번 시즌 첫 번째 콘서트를 열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리허설을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동료 한 명이 문자와 날씨 정보를 보내왔다. 지하철 전 노선 운행 중단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공연 취소 여부 문의를 묻는 사람들의 이메일이 빗소리처럼 빗발쳤다. 예정되었던 낮 리허설을 연주 직전으로 늦추고, 연습 시간도 절반으로 줄였다. 취소를 결정하기 전까지 시간을 최대한 벌기 위한 선택이었다.

첫날 콘서트를 마치고 함께 연주했던 또 다른 동료가 같은 시간 링컨센터에서 열린 스타 연주자의 공연에도 객석이 텅 비었더라는 소문을 듣고 ‘격려’ 문자를 보내왔다. 비록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쉽지 않은 상황을 뚫고 주말 세 번의 연주를 마쳤으니 이번엔 ‘The Show Must Go On’이 실현된 셈이다. 그리고 ‘잊지 못할 별의별 상황’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되었다.

준비한 연주를 잘 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었으니 괜찮은 거다. 그렇지만 여전히, 큰 손해는 싫다.
핼러윈에 음악회 열었더니...다 완벽했지만 객석은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