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은 정리에 서툴다 못해 정리를 무시무시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이따금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정리를 시작하고 홀린 것처럼 몰두하곤 했다. 정리란 거대한 촉감 상자에 손을 넣어 더듬다가 온몸이 상자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은 일이었는데, 그것은 미정이 시간에 대해 느끼는 감각과도 비슷했다. 중구난방 배치된 시간들이 떠도는 허공을 더듬기. 손에 닿은 파편을 복원하기. 복구된 것을 즉시 버리기. 손상된 것을 그대로 보관하기. 손에 닿는 순간 쥘 수밖에 없는 것과 접촉하기. 알 수 없는 것을 주머니에 넣기. 본다는 감각을 잊기 위해 애쓰기.

9월이나 10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좀 쌀쌀한 날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서랍을 정리하다 찾은 브로셔를 보니 그날은 쌀쌀했을 리가 없는 한여름이었다. 7월, 아니면 8월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7월이나 8월, 9월이나 10월 모두였을 수도 있다. 미정은 ‘블루’라는 제목이 붙은 두 편의 영화를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보았고 그 사이에는 몇 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 놓인 모든 날짜와 시간들을 파랑이라는 상태가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파랑의 새파랗고 어두운 입안에 웅크린 날들. 블루스크린 앞에서 파란색 옷을 입은 이의 몸을 삭제하듯이 얼굴과 손만 남아 있는 날들. 삭제된 부분의 몫까지 더하여, 파편으로 떠도는 부분에 대한 세부를 포함한. 점차 자욱해지는 파랑이 있고, 그 색채의 밀도와 밀도가 구성하는 허공이 시공간을 뒤덮고 환경을 만들고 환경에 맞춰 온도까지 바꿔 버린 것 같았다. 오직 새파란 색의 이미지만이 또렷했다. 그것이 블루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인지, 새파란 스크린에서 새어 나온 것인지, 새파란 공기를 느꼈던 살갗에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블루. 파랑. 미정은 두 단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듯 되뇌어 본다.

블루를 보는 일은 그림자 속에 아는 것을 모조리 집어넣는 일과 같다. 그림자의 너비와 부피는 몸의 움직임을 따르며 변화한다. 가변 크기의 공간. 더 보는 일, 이쯤이면 다 봤다 싶은 자리에서 더 머물며 더 보는 일을 통해 보는 것에서 벗어나기. 눈에 보이지만 아무것도 부수지 않는 손상을 그냥 보기. 그림자를 보기. 사이에 놓인 우리가 그림자 속에 던져넣은 것들을 보기. 미정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떠도는 먼지 한올 한올을 따라가며 보게 되고야 마는 사람을 안다. 그런 것을 놓칠 수 없는 눈을 안다. 그 난처함과 곤경을 안다.

파랑은 언제나 미정의 상태에 있다. 꿈과 현실 사이의, 불면과 가수면과 선잠 사이의 파랑. 새벽과 아침 사이의, 해질녘과 밤 사이의 파랑. 모니터 안에서 오류를 알리며 모든 작업을 유예 상태로 돌려놓는 블루스크린. 크로마키 작업을 위한 바탕으로서의 파랑. 수면과 물의 바닥 사이에 놓인 파랑. 시각과 비시각 사이에 놓인 파랑.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이에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허공으로 주어진 파랑. 허공을 보이는 것으로 채색하는 파랑. 파랑은 미정의 상태에 놓여있다. 파랑은 미정의 상태를 만든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거대한 미술관이라는 것은 몸을 의식하지 않고 머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죠. 그렇지 않아요? 미정이 물었을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손끝에서 흩어지는 담배 연기, 연기의 윤곽을 선명하게 도려내며 배경으로 존재하는 미술관 주차장의 거대한 어둠을 봤을 때. 고개를 돌려 건물 외벽이 만드는 거대하고 밝은 평면과 그 뒤로 늘어선 오래된 나무들과 궁궐의 기다란 돌담을 봤을 때는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정말로 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것, 영원히 이 자리에 이대로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물질의 내부에 풍성한 가변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고 어쩐지 편안하게 느껴졌다. 물질로서의 몸을 가진 우리가 신체 아닌 일종의 규격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크고, 넓고, 높지 않고, 깊숙한 이 공간이. 물질로 존재한다는 것은 대부분 끔찍한 일이다. 물질로서의 타인을 의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많은 몸들이 흘러가고 있는데 대부분의 몸들은 풍경이 되고, 풍경은 세트장의 얇은 배경지와 같아서 끝없이 말려 올라가고 말려 내려오며 교체된다. 다른 풍경을 가리고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볼 수 있고 의식할 수 있는 표면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벽과 일시적인 문을, 일시적으로 어두운 복도를 지나며 걸었다. 기둥이나 계단 같이 공간 전체의 순간성을 허무는 견고한 물체들을 지나며 걸었다. 모든것이 미정의 영역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에서 아늑함을 느끼며. 그러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 넓거나 좁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 스크린에 집중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이 의자 하나의 규격으로 조그마하게 뭉쳐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몸을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내는 발자국 소리가, 기척이, 동선이, 우리 사이의 자그마한 허공을 떠다니는 체온 같은 것들이 공간에 구체를 새겨넣고 있었다. 현실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미정의 손목 뼈가 움직이는 방향 같은 현실을. 만질 수 있는 현실을.

미술관 내부의 상영관은 가파른 배치의 객석을 갖고 있다. 단차가 큰 편이라 앞사람의 머리통이 조금도 스크린에 개입하지 않는다. 미정은 서로에게 개입하지 않으며 부드러운 높낮이로, 불규칙적인 높이와 각도로 배열된 머리통들이 모두 같은 파란빛으로 허물어지던 순간을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깨끗하게 파랑으로 비워진 직사각형, 비물질의 파랑, 떨리며 직사각형 바깥으로 퍼지는 빛만이 깨끗함에 균열을 내던 장면을. 너무 또렷한 나머지 그것이 꿈에서 본 장면인지, 현실에서 본 풍경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감독의 말처럼 현실이란 원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영화 역시 허구로부터 실제를 창조하려는, 뒤집힌 과정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불이 꺼진다. 화면 속의 몸은 파란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다. 파랑은 중간으로서 파랑 이전의 모든 것들을 삭제한다. 파랑 안으로 걸어들어가면 모든 것이 일시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미정은 파란색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파랗게 일렁이는 자신의 손을 본다. 흘러내릴 것 같다. 녹아버릴 것 같다. 주변으로 번지다 주변과 분간하게 될 수 없을 것 같고, 종국에는 주변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릴 것 같다. 새파랗게 깜빡이며 흘러내리는 프레임. 옆자리에 앉은 이의 윤곽 위로 생성되는 새파란 유막. 앞쪽으로 늘어선 머리통들이 새파랗게 떨리는 윤곽으로 변주된다. 새파랗게 흩어지는 빛과 섞인다. 비결정적인 파랑이 미정이라는 물질의 테두리를 넘어다니고 있었다. 빛을 퍼뜨리며 어둠을 밀쳐내는 얼굴을 향해. 눈동자까지 기어이 도달하는 빛에 속한 얼굴을 지나치며.

미정과 나는 잠든 사람을 본다. 그이는 새파란 담요를 덮고 있다. 얼굴을 반쯤 가릴 정도로 깊숙히. 겨우 드러난 귀밑 머리는 드문드문 하얗다. 그리고 드러난 몸의 중심에서 아주 조그맣게 피어나는 불. 씨앗을 파종하듯이, 겨우 싹을 틔운 하나처럼. 불은 자란다. 불타며 넓어지며. 공간을 집어삼키는 동시에 공간을 넓히며 타오르는 것이 불의 속성이므로. 잠든 사람의 몸은 규칙적으로 작은 높낮이를 만들며 움직인다. 일렁이는 장막 속의 풍경들. 풍경 위로 일렁이는 불 그림자. 불은 앞으로 나아가고 풍경은 말려 올라간다. 장면이 바뀔 때, 풍경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잠든 이의 눈꺼풀 역시 말려 올라가 있다. 얇은 막을 말아올리는 것만으로도 속한 장면을 바꿀 수 있나?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눈꺼풀이 언제나 하는 일이다.

자연을 하나의 얇은 막으로 대하거나, 얇은 막 하나를 자연으로 대하거나. 불은 투명한 레이어 너머로 유리된 것처럼 잠과 무관하게 타오른다. 미정은 잠든 사람과 불 사이의 투명하고 철저한 공간을 납득한다. 볼 수 있지만 가해지지 않는 종류의 손상을 행하는 불을. 불이 속한 잠과 현실 사이의 공간을. 의자 사이의 팔걸이 위에 놓인 미정의 손은 조금 전에 맞은 비 때문에 축축했고 비의 표면에 덧입혀진 에어컨 바람의 냉기로 차가웠다. 습기와 냉기를 덧입은 새파란 피부. 그 피부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을 온기가, 그것이 건물 바깥의 비가 그친 여름에 던져지면 불처럼 자랄 것이라는 사실이, 조명처럼 피부 안쪽에 안전하게 머물 정도로만 자랄 거라는 사실이 어쩐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그 불로부터 보호받는 것 같은 얼굴이. 밤과 밤 아닌 것 사이의 빈틈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파랑이.

우리는 또 다른 날 같은 어둠 속에 앉아 두 개의 별로 환생한 두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몇 세기에 걸쳐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주 조그마하고 빛나는 입자들이 떠다니는 시간과 공간을 보았다. 기억으로 자욱한 공간. 공간을 떠다니는 잠. 잠들로 얼룩진 베개.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얼룩진 미정의 얼굴을 보았다. 어떤 무늬의 얼룩이 덧입혀질지 정해지지 않은 얼굴을. 눈밭에 새겨진 발자국이 있다면, 눈과 발이 몸을 바꿔 서로에게 자국을 남길 수 있다면, 그런 부드러운 발자국. 눈이 발에 남긴 것 같은 가볍고 부드러운 자국으로 가득한 얼굴을.

우리는 누구의 것인지 정해지지 않은 기억들을 되풀이하며 본다. 언제나 파란 공간에 놓인 몸들을. 시간들이 앉아 있다. 시간의 머리통을 새파랗게 물들이며 풍경은 흘러간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미정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은 부드럽게 가라앉아 따뜻한 숨을 내쉬고 있었고 그 얼굴을 점령한 파란색 때문에 몸의 온기와 곡선과 부드러움이 새삼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다. 극장에서 드는 잠은 잠과 깸 사이에 부드럽게 걸쳐져 있다. 잠 속에서 잠든 이는 무엇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에 아늑하게 걸쳐져 있을 것이다.

잠에서 깬 미정은 손금 사이에 고인 파란빛을 들여다 본다. 가늘고 조그마한 빛. 사이에 있는 파편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사이가 거대한 공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가늘고 조그마한 사이. 얼마나 작은지를 감각하는 것이 미정에게는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미정의 손금에는 극장에 들어오기 전에 맞은 비의 습기가 잔류해 있다. 미정의 팔에도. 미정의 얼굴과 목과 발목에도. 그것은 쉽게 간지러움을 탈 것이고, 이곳의 공기가 조금 차갑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고, 평소처럼 부주의하게 캄캄한 복도를 나서다가 어딘가에 부딪히면 통증을 느낄 것이다. 볼 수 있지만 느낄 수 없는, 꿈이 행하는 손상과는 반대로. 미정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부드러운 높이를 느낀다. 우리가 부드러운 높낮이로 스크린을 향해 흘러내릴 때, 스크린 역시 우리를 향해 흘러내린다.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제도 오랜 옛날이다.** 극장을 나와 담배를 태우던 미정은 어느 소설에서 읽었다는 문장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담배를 더는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두 손가락 사이에 쥔 채로, 뭔가에 홀린 듯이, 손끝의 새하얀 길을 따라 조용히, 한 방향으로, 가느다랗게 자라는 조그만 불을 지켜보았다.

미정은 정리에 서툰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이따금 뭔가에 홀린 듯이 새로운 몸에 휩싸이게 된다. 파랑, 사이에서만. 사이의 공간에서만. 뭔가에 홀린 사람의 몸은 언제나 부드럽고 가볍고 깨끗한 법이다. 그런 몸은 움직임을 따른다. 얇은 막을 가볍게 밀어올리며, 눈을 뜨며, 보이는 것을 보며, 보이는 것을 궁금해하지 않으며, 유실을 용인하며,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며, 이해하지 않으며, 다만 보며. 시간을 털어내며. 서로를 겹치며 비로소 보이게 되는, 가벼운 몸으로. 눈꺼풀이 세계와 접촉하는 시간 만큼의 크기와 무게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블루’(2018)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블루’(2018)
데릭 저먼 ‘블루’(1993)
데릭 저먼 ‘블루’(1993)

이 글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블루〉(2018, 12분 16초)와 데릭 저먼의 〈블루〉(1993, 1시간 19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필름앤비디오 상영관을 재료로 쓴 것이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인터뷰 영상에서. (https://youtu.be/2Hz8kEyLP7Y?si=7e49jGM6lus1oYU8)
** 다와다 요코, 『지구에 아로새겨진』, 정수윤 옮김, 은행나무,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