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옥사나 리니우 ©SihoonKim 국립심포니 제공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 ©SihoonKim 국립심포니 제공
호기심과 기대감. 이 두 가지야말로 클래식 애호가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유력한 동인일 것이다. 지난 17일에 열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호기심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이었다.

이 날의 객원지휘자 옥사나 리니우는 최근 국제 무대에서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여성 지휘자 중 한 명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독일 드레스덴에서 공부한 리니우는 지난 2021년 여름 ‘바그너의 성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45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발탁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지휘하면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같은 해 이탈리아 굴지의 오페라극장인 볼로냐 시립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역시 이탈리아 시립 오페라 극장 259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에는 각종 무대와 매스컴, SNS 등을 통해서 반전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며 주목받기도 했다. 물론 '호기심'은 그가 화제성과는 별개로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는 역량을 갖춘 지휘자인가 하는 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니우에게 조금 가려진 감이 있었지만, 협연자인 세르게이 하차투리안도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한 하차투리안은 2002년 시벨리우스 콩쿠르(16세)와 2005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19세)를 석권했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과거 수차례 내한 무대를 통해서 탁월한 테크닉과 특별한 음악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를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지휘자에 대한 그것보다 조금은 더 컸던 면도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하차투리안이 국립심포니와 함께 협연하고 있다. ©SihoonKim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하차투리안이 국립심포니와 함께 협연하고 있다. ©SihoonKim
이날 하차투리안이 연주한 곡은 자신과 성이 같은 아람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와 더불어 옛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아람 하차투리안의 음악에는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카프카스 지역 민속음악의 숨결이 흐르고 있다. 세르게이 하차투리안의 연주에서 가장 돋보인 점이 바로 그런 카프카스 민속음악의 DNA를 예리하게 포착해서 자연스럽게 부각하는 능력 또는 자질이었다.

그의 연주에서는 완만하고 서정적인 선율들에선 물론, 신속하고 다이내믹한 악구의 세밀한 음형에서조차 그 토속적 억양 내지 뉘앙스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아무리 까다롭고 빠른 패시지도 능숙하고 여유롭게 받아 넘기는 빼어난 테크닉, 악곡 전편을 염두에 두고 표현의 강약과 완급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 주도면밀한 음악성까지 갖춘 그의 연주는 필자가 이제까지 접해본 대여섯 번의 같은 곡 연주 중 단연 최고였다.

하차투리안의 명연을 뒷받침한 리니우의 솜씨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리듬 및 다이내믹의 처리에서 다소 온건한 접근법을 견지하면서 협연자를 충분히 배려하며 악곡을 이루는 모든 부분과 요소들을 잘 조율했다.

그의 역량이 온전히 드러난 것은 2부에서 연주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에서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최대 역작인 이 거대한 교향곡을 리니우는 명쾌하고도 매력적으로 형상화했다. 가장 돋보인 면은 작곡가 특유의 호흡이 긴 선율을 재단하는 솜씨였다. 특히 현악 선율의 굴곡과 호흡을 섬세하고도 풍부하게 가꿔내는 손길이 남달랐다. 덕분에 작품 특유의 낭만적 흐름이 효과적으로 부각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편성 관현악의 모든 악기군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균형감각도 겸비했으며, 지나치게 장대한 탓에 종종 전편을 관류하는 내러티브가 어그러지곤 하는 이 대작에서 기승전결의 흐름을 조리 있게 짚어내며 탄탄하게 이끌어가는 거시적 안목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만 스케르초 악장의 전환부 등에서 목관부의 리듬이 명확하게 부각되지 않거나 중간 중간 저음부의 중량감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등의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객원 지휘자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이라는 한계를 감안하면 납득하고도 남을 결과물이었다. 근래 국립심포니 공연들 가운데 최상의 성과라 할 만한 멋진 공연이었다.

혹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 지휘자에게 모종의 제스처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부분은 공연 첫머리에 연주된 오르킨의 ‘밤의 기도’로 충분했다. 인상적인 바이올린 솔로와 죽음을 암시하는 탐탐(커다란 징을 연상시키는 타악기)의 울림으로 출발해 비교적 단순한 선율을 마치 기도처럼 반복해서 다루어나가는 그 곡은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런 참사가 이 시대에 벌어져야 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