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파이터' 한덕수
화려한 이력의 한덕수 총리지만 ‘무색무취’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영혼 없는 관료라는 삐딱한 시선도 적지 않다. 김영삼(차관)·김대중(경제수석)·노무현(국무총리·경제부총리)·이명박(주미대사) 정부에서 두루 중용된 업보(?)일 것이다.

‘잘못되면 나라 탓’ 하는 유교적 잔재가 남아 있는 사회에서 공직자가 감수해야 할 멍에지만 과도한 측면이 있다. 총리실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현안을 꿰뚫고 있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상사’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윗사람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도 인정받는 능력자를 ‘처세 9단’이라는 비하적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꽤나 폭력적이다.

그가 출세만을 좇았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 7일장에 조문하지 않아 친노세력에 찍히는 일을 자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외려 그는 할 말을 하고, 할 일은 고집스레 밀어붙인 이력이 적잖다.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소고기 수입, 한·미 FTA 체결 등 중요한 이슈에서 언제나 앞장서서 국익을 관철했다. “토끼는 한 평의 풀밭으로 만족하지만 사자는 넓은 초원이 필요하다”며 비이성적 포퓰리즘에 맞섰다.

최근 국회에서의 모습도 ‘소신 파이터 한덕수’를 돌아보게 한다. 거대 야당의 거듭되는 추경 요구에 한 총리는 “큰 재정, 보조금 확대로 잠시 늘어난 소득은 신기루”라고 반박했다. ‘묻지마 재정투입’의 부작용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다.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꼬투리 잡는 의원에게는 “정말 공부 좀 하세요”라고 직격했다. 종전선언 주장도 “궤변”이라고 일축했다.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이런 변신을 ‘출구 전략’이라며 시큰둥해하는 시각도 있다. ‘더 이상 공직을 맡을 일이 없으니 이제서야 마음을 비우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현시점에서 직책에 부여된 역할에 충실한 공직자의 자세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70대인 한 총리는 한국 경제개발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주역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971년 공직에 입문해 ‘한강의 기적’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연륜과 성과 인정에 인색하다. 요즘도 국회에서 총리를 향해 “지금 싸우자는 것이냐”(고민정) “동네 양아치”(윤재갑) 같은 막말을 던지는 의원들을 상대하고 있다. 참 수상한 시절이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