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로치 예일대 석좌교수는 미·중 갈등에 대해 “미국은 무역 적자 문제를 중국 탓으로 돌리고, 중국은 저성장을 미국의 봉쇄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경DB
스티븐 로치 예일대 석좌교수는 미·중 갈등에 대해 “미국은 무역 적자 문제를 중국 탓으로 돌리고, 중국은 저성장을 미국의 봉쇄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경DB
미국 내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로 꼽히는 스티븐 로치 예일대 석좌교수가 미국과 중국의 갈등 관계는 양국의 정치인들이 내부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려고 ‘거짓 서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은 무역 적자와 일자리 문제를 중국 탓으로, 중국은 경제성장세 둔화가 미국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로치 교수는 또 시장화 개혁을 추구하던 중국이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사회주의 이념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미·중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고 강조했다. 최근 다시 불거지는 부동산 개발 업체들의 디폴트 위기 사태가 중국의 금융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엔 “현실화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했다.

"美·中 갈등, 내부문제를 외부로 돌린 탓…'거짓 서사'가 충돌 키워"
로치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을 핵심으로 한 저서 <우발적 충돌>(사진)을 최근 발간했다.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30여 년간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한 그는 아시아 회장까지 지내며 세계 경제 및 국제 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왔다. 로치 교수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우발적 충돌>에서 핵심적으로 다룬 미·중 갈등의 근본적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정치적 비난 게임의 산물”

로치 교수는 현재 미·중 갈등을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편리한 비난 게임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어 두 나라는 ‘저축률’이라는 공통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미국은 낮은 저축률과 이로 인한 투자 부족, 생산성 향상 지체 등이 문제다. 이로 인해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자 미국 정치인들이 중국을 대상으로 보호주의 조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저축률이 과도하게 높아서 문제다. 대부분의 가정이 적절한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령화를 맞고 있어, 새롭게 얻은 소득을 지출하지 않고 비상금으로 따로 챙겨두기 때문이다. 과도한 저축은 곧 소비 부진으로 이어져 중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992년 이후 중국의 가계 저축은 가처분소득의 약 35%를 차지해 같은 기간 미국의 평균 개인 저축률(6.3%)의 다섯 배가 넘는다.

로치 교수는 “미국은 무역 적자 문제를 중국 탓으로 돌리고, 중국은 저성장을 미국의 봉쇄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국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책임졌어야 할 부분을 상대 탓으로 왜곡시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이 같은 거짓 내러티브가 갈등을 고조시키는 연료”라고 주장했다.

이념화가 갈등에 기름 부어

미·중 갈등에 기름을 부은 것은 시 주석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대내외 정책 변화였다. 1980년대 덩샤오핑 시절 중국은 국가 통제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시진핑 체제가 들어선 이후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로치 교수는 “국가와 중국 공산당 이데올로기가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시계추가 (이념으로) 다시 회전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 결과 중국 국유기업 개혁이 무산되고, 막대한 부채가 쌓였다는 게 로치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2022년 말 중국의 비금융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97% 수준인데, 이는 시 주석이 당 총서기로 처음 임명된 2012년 말보다 100%포인트 이상 증가한 수치”라고 말했다. 비금융 부채란 기업의 차입, 정부의 채무 및 가계 대출 등을 일컫는다. 로치 교수는 “시 주석은 미·중 갈등을 이념 대결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며 “시 주석이 ‘중국몽’을 공공연히 주장하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확고하게 잡았던 패권을 중국이 위협하려 들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분석했다.

미·중 사이에서 한국 쉽지 않을 것

안보 동맹국인 미국과 경제 의존도가 높은 중국 사이에 낀 한국 문제에 대해선 “한국이 중국 외 대외 수요처를 다변화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됐다”며 “말할 필요도 없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중국 수요가 꼭 필요하지만, 북한을 포함한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감안하면 안보 문제 또한 한국에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로치 교수는 “최근 미국, 일본, 한국 간 3국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캠프 데이비드 합의는 이런 미묘한 균형의 판도를 바꿀 계기가 될 수 있다”며 “한국도 국가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국, 중국과 거의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번 합의는 한국 무역 흐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올해 6월부터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재닛 옐런 재무장관, 존 케리 기후특사,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 등이 연이어 중국을 방문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내용이 부족했다는 점에선 아쉬움을 나타냈다. 로치 교수는 양국의 소통을 위해 무역과 기술부터 인권과 기후에 이르기까지 양국 관계의 다양한 측면을 폭넓게 다룰 수 있는 사무국 설치를 제안했다. 상근 조직으로 하며 중립적인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변호사와 과학자, 경제학자, 기타 기술 전문가 등 양측 사람들을 동등하게 배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핫라인’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치 교수는 한편 헝다(에버그린), 비구이위안(컨트리가든) 등 중국 부동산 기업의 파산이 재앙적인 금융위기를 촉발할 이른바 ‘리먼 모멘트’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과 일본도 과거 부동산 버블을 겪었지만 두 나라 모두 도시 인구 비중이 80% 이상 됐을 때 발생했다. 반면 중국은 도시화율이 20% 미만이던 1980년대 초반 이후 급격히 증가했지만, 현재도 65%에 불과하다. 여전히 도시로 이주할 인구, 즉 부동산 수요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