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Getty Images Bank
“오늘날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스티븐 로치 미국 예일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최근 펴낸 <우발적 충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로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1982년부터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에서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고, 2007~2010년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을 지냈다. 한국도 종종 방문해 세계 경제에 대한 의견을 밝힌 유명 인사다. 아시아 전문가인 그는 60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에서 미·중 갈등이 ‘거짓 서사’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거짓 서사가 만연한 건 이를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치인이다. 이들은 내부 문제를 외부 세력 탓으로 돌린다. 제조업 붕괴 등 미국이 겪고 있는 곤경은 중국의 불공정하고 약탈적인 경제 공격 탓이라는 식이다. 로치는 “이 왜곡된 이야기를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수많은 지역사회에서 미국인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 정치인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꼬집는다. 반대로 중국에선 ‘아편전쟁’ 등 과거의 굴욕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미국 등 서구 열강이 언제든 다시 중국을 공격해 올 수 있다고 두려움을 부추긴다.

책은 거짓 서사를 파헤치는 데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미국의 무역 적자 증가는 중국 탓’이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로치는 “미국의 무역 적자는 더 깊은 문제, 즉 만성적인 국내 저축 부족이라는 문제가 밖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미국 소비자와 정부의 방만한 지출이 무역 적자의 주요 원인이며, 이는 중국을 때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의 강제적인 기술 이전 요구, 지식재산권 도용, 사이버 해킹, 화웨이 통신장비의 백도어 등도 과장됐다고 말한다. 미국 정부가 중국에 혐의만 뒤집어씌우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지식재산권 도용 피해 규모도 추정치에 불과할 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로치가 보는 중국의 근본 문제는 ‘과잉 저축’이다. ‘과소 저축’이 문제인 미국과 반대다. 국내 생산에서 민간·정부 소비를 뺀 국내 저축은 투자 재원이 된다는 점에서 보통 경제 성장에 이롭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저축은 해가 된다. 소비와 투자라는 경제 성장이 양 날개 중 한쪽 날개로밖에 날지 못하게 한다.

중국 정부도 저조한 소비를 원한 건 아니었다. 자연스레 소비가 늘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투자와 수출에 기댄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가운데 소비 증가도 기대에 못 미치면서 경고등이 켜졌다. 중국 국민은 불만이다. 이를 달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서구가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거짓 서사를 퍼뜨리고 있다는 게 로치의 설명이다.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로치는 중국의 인권 침해와 억압, 주변 국가에 대한 호전성에는 별말 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공정 무역 행위, 중국에서 피해를 본 기업 사례를 그냥 과장됐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미국의 방만한 소비와 정부 지출 때문에 무역 적자가 발생했다는 분석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기축통화인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 등이 임금과 환율을 억눌러 수출을 늘렸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책마을] "美·中 갈등 본질은 정치인들의 책임회피와 잇속 챙기기"
그럼에도 큰 틀에서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가 옳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양국은 협력 관계에 가까웠다. 경제의 상호 의존성이 낮았던 미국·소련과 달리 미국·중국 관계는 제로섬이 아니다. 로치 말대로 미국과 중국이 처한 곤경은 스스로 만든 부분이 작지 않다. 상대 탓만 해선 자국의 문제가 나아질 수 없다.

로치는 “최악의 결과를 피할 기회는 지금도 여전히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려면 ‘쉬운 길’인 거짓 서사를 버리고 ‘어려운 길’인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서로 간 신뢰를 회복하고 상호 의존으로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로치는 이렇게 말한다. “두 나라는 앞으로도 계속 거짓 서사에 매달릴까, 아니면 그것을 극복할까. 이는 21세기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양국 관계의 전망을 묻는 결정적인 질문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