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피범벅…거장 커푸어가 7년만에 들고 온 신세계

숭고한 것들은 때로는 보기에 불편하다. 예컨대 출산이 그렇다.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지만, 그 장면을 직접 보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뇌와 내장도 마찬가지. 삶을 가능케 하는 경이로운 기관이지만 이를 직접 보는 건 일반인에게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생물이 죽은 후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그렇다.

경이로움과 공포감을 동시에 주는 것들은 많다. 우주에 무한히 펼쳐진 칠흑같은 어두움, 인간의 미약함을 실감케 하는 대자연의 소용돌이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복잡한 느낌을 세계에서 가장 잘 표현한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인도 출신의 영국 작가 아니쉬 커푸어(69)다. 그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괴팍한 성격, 신기술로 개발된 물감을 자기만 쓰겠다며 독점 이용권을 구입하고 다른 사람의 사용을 금지하는 행보 등으로 인해 ‘예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예술가’로도 불린다.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작가들조차도 커푸어의 실력이 최고라는 것만큼은 모두 인정한다. 커푸어가 베네치아비엔날레 신인상과 영국 최고 권위의 터너상을 석권하고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등 세계 최고의 전시 장소에서 작품을 내보일 수 있는 까닭이다.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커푸어의 개인전은 한국에서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볼 기회다. 국제갤러리의 3개관을 모두 사용해 그의 대형 조각과 드로잉 등 20여점을 펼친 대규모 전시다. 커푸어의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는 건 7년만이다.

작품들이 주는 인상은 그야말로 강렬하다. 첫번째 전시장인 3관(K3)에서는 중량 500kg가 넘는 4점의 거대한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운석이나 바윗돌을 연상시키는 조각 위로 그물처럼 보이는 유리섬유가 덮여 있다. 피와 살점, 내장을 연상시키는 작업들이다.

작가를 상징하는 작업들은 2관(K2)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강렬하고 선명한 검은색과 붉은색이 폭발하는 듯한 회화와 조각들이 전시돼 있다. 윤혜정 국제갤러리 디렉터는 “핏빛 색채를 통해 원초적인 생명력과 여성적인 창조의 힘을 표현한 것”이라며 “아름다움과 불편한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가 담겨 있는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낼름 내민 새빨간 혀를 표현한 ‘Tongue’이 특히 인상적이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여신 ‘칼리’의 길게 늘어뜨린 혀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칼리가 관장하는 분야가 파괴와 시간, 죽음, 변화라는 점이 커푸어의 주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실리콘과 강화유리, 유화 물감을 사용한 대형 회화 신작들도 완성도 높다.

1관(K1)에서는 상대적으로 무난한 드로잉 작품들과 함께 커푸어를 상징하는 도료 ‘반타블랙’을 사용해 만든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반타블랙은 ‘세상에서 가장 검은 색깔’로 불리는 색으로, 거의 모든 빛(99.6%)을 흡수해 조각의 모양을 완전히 지운다. 덕분에 옆에서 보면 입체적으로 튀어나온 모양도 정면에서는 그저 평면 도형으로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우주의 무한함이나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이 ‘검은 조각’들을 통해 커푸어는 ‘있으면서도 없는 느낌’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모든 미술 작품이 그렇지만, 특유의 색채와 스케일 덕분에 사진으로 볼 때와 직접 볼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작가의 이름값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시라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한 큐레이터는 “비슷한 주제를 표현한 다른 작가들의 전시를 보면 커푸어의 작품이 얼마나 완성도 높은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글로벌 대형 화랑들에 필적할 만한 국제갤러리의 저력을 보여주는 전시기도 하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열리며, 시간당 관람 인원이 제한돼 있어 전시를 보려면 현장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1~3관 옆에 있는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의 ‘동면 한옥’ 역시 수준 높은 전시다. 세계 미술계에서 명성이 높은 양혜규의 다양한 조각과 설치 작품을 밀도 높게 감상할 수 있다. 전통 설화에서 영감을 받은 ‘소리나는 동아줄’과 무속 신앙에서 영감을 받은 ‘황홀두폭병-방언 충천 춘하 기수도’ 등 수준 높은 신작이 가득하다.

9월 4~9일에는 개관 시간을 밤 8시까지 연장하며, ‘삼청 나이트’가 열리는 7일에는 밤 12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해가 진 뒤 조명이 꺼진 한옥 공간에서 손전등을 들고 작품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시는 10월 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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