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家처럼 미술품으로 세금 내기, 아무나 못한다?
이건희 컬렉션 계기로 문화재·미술품도 물납 대상 인정
납부하려는 상속세, 2000만원
넘고 금융재산보다 많아야
품질 등 가치평가 어려워 심의 ‘최장 넉달’…절차도 복잡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후 삼성그룹 오너일가의 막대한 미술품이 국립기관에 기증됐다. 당시 오너일가가 약 12조원의 상속세 부담을 지게 되자 국내에선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신 납부하자”는 주장이 잇따랐다. 영국·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들이 안정적으로 문화재를 확보하기 위해 미술품 물납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치열한 논의 끝에 올 초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도’를 포함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물납은 세금을 금전으로 내기 어려울 때 물건으로 대신 내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부동산과 유가증권만 물납 대상으로 인정됐지만, 미술품도 포함되면서 이 제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미술품 물납제 도입 계기가 된 ‘이건희 컬렉션’

삼성가(家)의 미술 사랑은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장의 선친인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이 고미술품에 심취해 광적으로 작품을 수집한 사실은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서울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 역시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삼성그룹이 개관한 리움미술관의 관장을 맡기도 했다.

이 회장이 사망한 지 6개월이 지난 2021년 4월 삼성그룹은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의 상속세 납부 계획을 발표했다. 이 무렵 상속세 규모만큼이나 관심을 끌었던 것이 ‘이건희 컬렉션’이었다. 베일에 가려져있던 고미술품·유명 서양화·국내 근대미술품 등 미술 작품 2만3000여점이 세상에 공개됐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실에서 열린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에서 많은 시민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실에서 열린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에서 많은 시민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삼성그룹은 이들 작품 중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동보살입상’을 비롯해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 고려시대 불화인 ‘천수관음 보살도’ 등 60개 지정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근대미술 작품 1600여점도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당시 공개된 이 회장의 작품 목록에는 샤갈, 르누아르, 모네, 달리 등 유명 해외 화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았다. 이들 미술작품의 금전적 가치는 모두 합해 최소 2조~3조원으로 추정됐다.

초고가 미술품이 기증되자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해 5월 간송미술관이 소장해온 문화재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을 각각 15억원(경매 시작가격 기준)에 경매에 부치면서 물납 제도 도입논의에 더욱 불이 붙었다. 전성우 전 이사장이 별세한 뒤 유족이 거액의 상속세 납부를 위해 소장 문화재까지 경매에 넘기는 일이 벌어져서다. 당시 간송미술관 소장품 중 약 4000여점이 상속세 부과 대상으로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까다로운 조건 충족해야 물납 가능

미술품을 물납하려면 일단 내야 할 상속세가 2000만원을 넘어야 한다. 부과받은 세금이 금융재산보다 많아야 한다는 조건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이에 더해 문화재·미술품에 대한 납부세액만 물납이 허용된다.

물납 절차 역시 엄격하다. 상속인은 일단 관할 세무서에 직접 감정가를 기재한 뒤 물납을 신청해야 한다. 국세청은 이 사실을 2주 안에 문화체육관광부에 통보하게 돼 있다. 문체부는 별도로 물납 신청목록에 오른 문화재가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있는지, 가액 평가가 적절한지 등을 심의한다. 최장 4개월 간의 심의를 거쳐 물납 여부가 결정된다.
'이건희 컬렉션' 의 작품 일부. 윗줄 왼쪽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가운뎃줄 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내 작품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아랫줄 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외 작품인 호안 미로의 '구성',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삼성 제공
'이건희 컬렉션' 의 작품 일부. 윗줄 왼쪽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가운뎃줄 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내 작품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아랫줄 왼쪽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외 작품인 호안 미로의 '구성',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삼성 제공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과 복잡한 절차를 둔 것은 유가증권과 달리 문화재와 미술품의 가치 평가가 쉽지 않아서다. 국내 미술품 반출을 예방하고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목표도 있다. 작품의 진위나 품질을 판단하는데 꼼꼼해질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현재까지 미술품으로 세금을 내겠다고 신청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납 사례가 아직 없는 만큼 제도를 보편화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물납 제도가 올해 1월 1일 이뤄진 상속까지 소급 적용되기 때문에 삼성그룹 오너일가는 이 제도를 활용하지 못할 전망이다. 이들은 상속세 납부를 위해 보유 중인 삼성 계열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놓은 상태다. 홍라희 여사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의 주식담보대출만 4조781억원에 달한다. 보유 지분의 40%가 대출 담보로 잡혀있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