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선물 잘 하는 법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다들 5월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이 분주한 5월이 좋다. 생활에 치여 잊고 살던 마음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알람을 울려주니,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은혜로운 마음 모두 기지개를 켠다. 사랑이니 존경이니 쑥스러워서 하지 못한 말도 대놓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물은 참으로 하기 힘들다. 매년 하는 일이라 익숙할 만한데도 그렇다. 마음이 클수록 더 힘들다. 이 정도 선물로 될까, 너무 소박한가, 부담스러워할까, 망설이다 보면 아예 그만두게 된다.

선물을 했다가 실망한 얼굴을 본 적도 있고 부담스럽다며 거절당한 적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선물을 잘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사인 동생은 베푸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불필요한 물건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어하는 유형이다. 동생은 선물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뭐가 필요하냐고 직접 물어본다. 그 덕분에 나는 시집 출간 기념 선물로 서명본을 보낼 때 쓸 내 시집 30권을 동생에게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런 동생의 5월은 얼마나 바쁠까. 아들 서진이에게도 어김없이 문자가 온 모양이다.

“엄마, 이모가 저한테 어린이날 선물해준대요. 근데 게임 머니는 안 된대요.” SNS의 쇼핑 플랫폼에서 받고 싶은 선물을 고르라고 했단다. 그런데 서진이는 요즘 게임 머니 말고는 받고 싶은 게 없어서 문제다.

“엄마, 저 뭐 받고 싶다고 해요?” 나는 고심 끝에 비싼 수제 비누를 골라줬다. “엄마가 갖고 싶은 거 말고 제가 갖고 싶은 걸 말하래요.” “그게 네가 갖고 싶었던 거라고 해.” 그러나 동생은 믿지 않았다. 착하고 순한 조카가 엄마 눈치 보느라 자기가 갖고 싶은 걸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아! 엄마, 이모가 비누도 사주고 다른 것도 사준대요. 또 뭐 갖고 싶다고 해요?” “그래?? 그럼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보디워시를 사달라고 하자.” 동생은 서진이에게 정말 보디워시가 갖고 싶은 게 맞냐고 거듭 물었다. 서진이는 자신이 샤워를 얼마나 좋아하며 그때 맡는 비누 향은 얼마나 달콤한지 설명했다.“우아! 우아! 엄마, 이모가 비누도 사주고 바디 워시도 사주고 하나 더 사준대요.”

며칠 전, 향기로운 수제 비누, 보디워시와 함께 아이가 갖기에는 조금 어른스러워 보이는 가죽 휴대폰 가방이 배달됐다. 직접 물어보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고 선물은 어떻게 하나. 선물 잘하는 사람들은 관찰력과 기억력이 좋다. 상대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 앞에서 오래 멈춰서고 오래 망설였는지….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좋은 선물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내게도 기억에 남는 선물이 하나 있다. 프랑스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과 글이 실린 도록이다. 몇 년 전 일인데,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포콩의 전시가 한창일 때였다. 거길 정말 여러 번 갔었다. 전시장을 갈 때마다 도록을 살까 말까 망설였다. 집어들었던 도록을 도로 내려놓길 반복했다. 그런데 내 생일엔가 딱 한 번 전시를 같이 보러 간 친구가 그 도록을 선물로 준 것이다. 친구는 마치 내가 모서리를 접어놓은 한 페이지를 펼쳐본 사람처럼 말했다. “너, 이거 갖고 싶어 했지.” 그때 알았다. “정말 갖고 싶어 했네….” 선물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조금 원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내 마음을 친구가 안다는 게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포항에서 어버이날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엄마가 김치통을 내민다. 열무로 담근 물김치다. “무겁게 뭐 하러 이런 걸 싸. 집에서 밥 먹을 일도 없구먼.” 엄마가 애써 만든 걸 가져가기 귀찮은 마음이 드는 것도 죄스러워서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 좋아하는 거야.” 막상 김치통을 받아 드니 매일매일 열무가 자라는 텃밭으로 가 하루의 절반을 쓰고 돌아오는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엄마가 물김치를 담그면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곤 했다. 이걸 안 가져왔으면 어쩔 뻔했나. 물김치에 없던 입맛이 돌아오고 잃었던 감각과 생기가 돌아온다. 내 몸에 녹음된 해변의 새소리, 파도 소리, 빗소리를 마구마구 꺼내준다. 물김치 하나만 먹었을 뿐인데, 내 몸이 잠시 숲이 된 기분이다. 어떤 음식은 미묘한 화음을 주고 언어를 춤추게 한다. 물김치에 국수를 말아 국물을 크게 한입 들이켜니 아, 여름의 몸이 된 것만 같다. 싱그럽고 새파란 몸. 그러고 보니 선물은 잘하는 게 아니라 잘 받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