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수동 블러썸제이스튜디오에서 열린 꽃 전시회 <노란 노랑>에 다녀왔다. 빌라 건물 4층의 작은 공간은 노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커다란 거울에 비친 사각 프레임과 의자를 비롯해 웰컴 티를 담은 컵까지 꽃잎의 생생한 노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놀란 것은 빛나는 노란 꽃잎들 속에서 붉은 작약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노란 꽃의 대명사 해바라기 생각을 조금 했다. 전날 읽은 중국 한족 작가 리쥐안의 산문집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 때문이었다. 온종일 홀딱 벗은 채로 키 큰 해바라기 밭을 돌아다니는 엄마의 모습을 뤼지안은 “물속에서 둥둥 뜨지 않도록 노력하며 강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해바라기 밭에 물을 대느라 땀범벅이 된 엄마가 해바라기 하나하나가 물을 충분히 머금는지 지켜보는 마음은 무엇이고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마음은 또 무엇일까? 물이 이 대지 위에서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 해바라기라니…. 리쥐안의 말에 해바라기가 품은 성결한 식물의 길이 느껴졌다. 어쩌면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 세상 모든 꽃의 꼭대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우리는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마다 꽃다발을 안기고 싶은 걸까?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작약
작약 좋아하는 친구에게 작약을 선물해야지 생각했다. 꽃을 받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화병에 꽂은 작약이 얼마나 예쁜지, 오늘은 몇 장의 꽃잎이 떨어지고, 비밀을 움켜쥔 봉오리는 얼마나 벌어졌는지 이야기해줬다. 가만가만 듣고 있는데 친구의 목소리에서 작약 냄새가 났다. 이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할까. 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일수록 쓰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다. 예고도 없이 꽃이 피고, 예고도 없이 비가 오고, 예고도 없이 작약이 온다. 물론 그 징후는 울먹이던 구름만 알 것이다. 작약이 피면 뻐꾸기는 품지 못하는 마음으로 알을 낳겠지만, 나는 그래도 한 편의 시를 쓰고 싶다. 어제는 봄비가 왔다. 시인 안도현은 봄비 맞는 작약을 이렇게 썼다. “펼친 꽃잎/접기 아까워/작약은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네”(식물도감) 모란은 햇빛 짱짱할 때 봐야 예쁘고, 작약은 비올 때 봐야 예쁘다는 할머니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닌가 보다.

작약작약 쏟아지는 빗소리를 그리워하다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고양이나 염소 혹은 개가 죽으면 땅에 묻고 꼭 그 위에 작약 뿌리를 심어주었다. 뿌리에서 붉은 싹이 돋아 작약꽃이 피기까지 할머니가 고양이나 염소나 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작약을 보살피며 하던 말들이 생각난다. 나비야, 백구야, 염생아, 하며 하던 말들….

작약은 그 뿌리가 오래될수록, 큰 꽃송이를 가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고향 아버지의 텃밭엔 작약이 가득했다. 친구에게 작약을 선물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것이 작약인 줄 몰랐다. 작약이 쌍화차의 주원료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시를 쓸 때는 아는 것도 많아지고 모르는 것도 많아진다. 요즘엔 꽃이 그러하다.

친구에게 선물해 놓고는 “몰랐는데, 작약이 예쁘더라. 노란 꽃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작약이 정말 예쁘더라.” 감탄했더니, 남편이 작약 한 다발을 사 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코랄 빛 작약이 활짝 피어 있다. 세상에 꽃이 없다면 누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 줄까. 내 얼굴을 기억하려고 내가 쳐다볼 때마다 나를 뜯어보고 있다. 작약이란 시를 쓰고 싶다. 작약으로 들어가 볼까. 작약 뿌리가 되어 볼까. 작약이 부르는 나비가 되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