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너지 업계가 '생경한 동맹'을 맺고 있다.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 기반의 전통 에너지 기업과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업체들의 의기투합이다. 기후변화 위기 속에서 각각 탄소 배출의 주범, 탄소 저감의 일등공신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이다. 이들의 '불편한 동거'는 미 정치권에 인프라 허가 절차를 합리적으로 단축시켜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비롯됐다.

IRA 혜택 누리려면 인프라 허가제 개선해야

미국 청정에너지협회(ACPA) 대표단은 최근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을 방문했다. 1970년대 제정된 국가환경정책법(NEPA)를 개정해달라는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다. 국가환경정책법은 대규모 인프라 시설을 건설할 때 환경 평가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허가제 규정을 갖고 있다. 해당 규정의 검토 및 허가 과정이 긴 데다 소송 규정까지 담고 있어 관련 절차가 한없이 늘어지기 일쑤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미 청정에너지협회의 제이슨 그루멧 대표는 "인프라 허가제를 개선하는 방안에 대해 화석연료 에너지 기업뿐만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기업들, 유틸리티(전력망) 업계의 대표들이 거의 매일 다함께 만나 머리를 맞대고 있다"며 "조만간 공동 대표단을 국회에 파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환경 평가 절차 논란은 엑슨모빌, 코노코필립스 등 메이저 석유기업들의 오래된 불만이었지만, 최근엔 신재생에너지 업계까지 한목소리로 관련 조항 개정을 요구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 배경에는 작년 8월 발표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가 있다. IRA는 친환경 산업에 세금 공제 및 보조금 등의 형태로 총 3690억달러(약 490조원)짜리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기후변화 위기 해결에 앞장서는 동시에 미국의 친환경 산업을 육성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전기자동차 업계, 친환경 에너지 업계 등에 '폭탄급 선물'을 안겨주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신재생에너지 개발사들은 "하루 빨리 IRA의 과실을 누리고 싶어도 국가환경정책법상 허가제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송전망 확장도 시급하다. 주로 도시 외곽에 위치한 (태양광, 육·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인프라에서 발전한 전력을 도심으로 이동시키는 데 필요한 고압 송전선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 프린스턴대 교수진은 최근 "송전망 확장 속도가 현재 수준보다 2배 이상 증가하지 않는 한 IRA 시행으로 인한 탄소 저감 효과가 80% 가까이 떨어질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환경단체들의 반대에 발목잡히나

미 에너지 업계의 연합 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우리는 국가 부채한도 상향 문제를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치 국면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양당의 부채한도 협상 과정에서 국가환경정책법 개정안이 패키지로 묶여 처리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미국석유연구소의 마이크 서머스 소장은 "에너지 업계의 모든 관계자들이 인프라 허가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단결했다"며 "부채한도 협상 시즌 내에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490조원 판 깔렸는데 왜 웃질 못하니"… 美 IRA 속사정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그동안 미 하원에는 관련 개정안이 산발적으로 발의됐다 무산되기를 반복해왔다. 공화당은 주로 화석연료 기업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당은 신재생에너지 기업들의 이익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한 하원에서 얼마 전 자체적으로 단일 개정안을 마련한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양당 강경파의 반대 움직임이 관건이 될 전망이 나온다. 환경운동 단체들의 입김도 거세다. 친환경 단체 어스저스티스(Earthjustice)의 라울 가르시아 부총재는 "인프라 허가제를 간소화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청정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며 "화석연료 산업에 조금이라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그간 내세워 온 고상한 친환경 레토릭의 위선이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에너지는 국가의 미래입니다. 세계 각국이 에너지를 안보적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이유죠. 21세기의 에너지는 원유, 가스 같은 매장 자원을 넘어섭니다. 신재생에너지, 원자력발전, 탄소포집·저장·활용, P2X(Power-to-X) 등 바야흐로 '에너지 기술의 시대'입니다. 친환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리튬, 희토류 같은 각종 광물을 안정적으로 얻으려는 움직임도 한창입니다.
세계 주요국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요? 에너지·광물 확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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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