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원고 속 단어 하나하나를 한땀 한땀 읽고 있는 내가 아닌, 퇴근한 뒤 소파에 느슨한 자세로 누워, 내키는 속도로 단어를 보는 나는 묘사에 약한 편이다. 곁눈으로 다음 단락의 단어 뭉텅이가 보이면 마치 언덕처럼 높은 과속방지턱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덜컹덜컹 흔들리며 생각해본다,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매체의 묘사가 너무 탁월해서 텍스트에서의 묘사의 자리는 비좁아지지 않았나, 그러니까 원래 묘사는 읽기 어려운 거라고….

그렇지만 책이라는 매체에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책에서도, 아니 책이기에 묘사가 진정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과 이상우의 소설 <두 사람이 걸어가>를 같이 읽고 싶다. 서술어나 조사 등의 요소를 과감히 생략하거나, 단어가 다음 단어로 이어질 때 예상치 못한 비약을 발생시키는 그의 문장은 오독의 위험을 끌어안고 자유롭다.

그의 문장은 묘사에도 해석이 개입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평범한 비유가 아니라 적확하게 새로운 표현을 고안해내는 고투. 문장들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의 독특한 표현이 읽는 이를 소외시키기보다, 단어의 낯선 결합을 헤아리는 동안 각자의 기억 속에 잠든 심정을 퍼올려 동기화시킨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손잡이 붙잡은 사람들의 틈을 헤쳐 번화가에서 내릴 때 저녁은 잠정적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버스 불빛에 갇힌 이들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는 문구를 일별한 뒤로 난 해질녘이 되면, 잠정적이구나, 말해보며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감히 말하자면 한국어의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순간들. 내가 표현하는 만큼이 나라고, 즉 내 말의 영역이 곧 나의 영역이라고 믿는다면, 이상우의 문장을 열기구처럼 붙잡고 나는 부유하게 된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게 늘 정돈된 형태로 이뤄지지는 않는다고 그의 묘사가 알려주는 것처럼, 일기처럼 분절돼 진행되는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그대로다.

언어를 향한 그의 뼈를 깎는 고행이 소설을 읽는 나의 풍경을, 즉 세계를 어떻게 찬란하게 덧칠해줄 것인지 기대하면서. 소설 속 한마디 한마디가 풍경은 표현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다시 체험할 수 있는 더께라는 것을 느끼게 했으니까.

2020년대는 아직 중반에도 이르지 않았지만, 훗날 사람들은 2020년대를 돌아보며 이 소설을 첫손으로 손꼽을 것이다. 그러니 탐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담당 편집자님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나는 괜히 그분이 동지 같고 편집기를 청해 오래 듣고 물어보고 싶다. 아름다운 소설을 맡으셨네요. 그런데 소설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전 이 소설이 아름다운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요. 그래도 말해보자면, 우리가 아직도 탐사하지 못한 내면의 잠정적인 영역에 실마리를 주는 소설이며,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넓고 두터운지 알려주는 그 프리즘이 세계를 다채롭게 채색한다고요…. 굽이굽이 머릿속으로 할 말을 풀어보게 된다.

이재현 문학동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