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곤의 행정과 데이터과학] 21세기 시민의 '느린마음 정부' 사용법
흔히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 만에 처리할 일도 나이가 들면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또 겨우 일을 마치고 나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음을 더욱 자주 느끼게 되기도 한다. ‘마음시간(mind time)’의 이러한 오묘한 현상은 행정과 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정부가 과잉 의욕을 가지고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느린 마음’을 가진 것도 문제다. 느린 마음을 가진 정부는 변하는 흐름을 읽어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재나 과거에 안주한다. 세상은 두 배 빠르게 변하는데 느린 마음을 가진 정부가 현실보다 절반이나 느리게 변한다면 현실과 정책은 4배나 되는 속도로 격차가 벌어진다. 그리고 몇 년만 지나면 격차에도 가속도가 붙어 변화 속도와 현실 간 간극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느린 마음을 가진 정부는 느리게 변하는 정책의 심각성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미국의 예금자보호 한도는 2008년 이후 25만달러로 책정됐지만, 한국은 지난 23여 년간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2001년 이후 5000만원으로 고정돼 있다. 지난 40년(1982~2021년) 동안 소비자 물가는 267.6% 상승한 한편 전기요금은 47.1% 올랐다. 대학 등록금은 2008년 이후 15년 동안 동결됐으며, 대학 4년간의 등록금이 재수 종합반 1년 학원비보다 적은 상황이 발생했다.

지방 소멸을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의원 지역구 의원 수는 줄지 않고 있고 지방행정구역은 거의 변화가 없다. 그 결과 강원 태백시는 공무원 1인당 주민 수가 60명으로 경기 의정부시보다 5배 이상 많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5급 공무원을 뽑는데 아직도 컴퓨터가 아닌 필기로 시험을 보고 있다. 21세기에 정부가 금리, 식품 가격, 소줏값을 통제하고 물가를 지도하는 과거로의 회귀현상도 발생하고 있고 정책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대형마트 등의 영업시간 규제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근로시간을 규제해야 할 필요성이 아직도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52시간으로 단축된 근로시간을 다시 69시간으로 환원하려는 정책도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체된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관료는 비난받을 위험이 크다. 빠른 마음을 가진 관료는 왕따(?)를 당하고, 정책 지체로 인한 잠재적 비용은 미래 세대가 부담하게 된다. 조직 내에 느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혁신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조롱받고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뭉친 사람들만 정부 안에서 늘어난다.

느린 마음으로 가득 찬 정부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시민’에게 그 열쇠가 있다. 시민이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숙의하며 분석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주택 미분양의 예를 들어보자. 미분양은 나쁜 것이니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보다는 준공 후 미분양은 늘지 않았으며,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미분양이 심각한 상황이고, 시행사들은 손실을 보지 않으려고 분양가를 낮추지 않고 있으며,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한 금융회사가 피해자라는 기본적인 통계정보와 현황을 시민이 파악해야 한다.

시민은 문제 중심의 사고, 정책 중심의 사고를 해야 한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의 문제보다는 정부가 어떻게 문제를 진단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에 관심을 둬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시민이 정부에 정책의 성과와 책임을 요구하면 정부는 혁신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인재를 찾고, 이를 열정적으로 집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시민이 편가르기에 빠져 있으면 정치인들은 자기편 챙기기에 몰두하고 국민연금 개혁 같은 골치 아픈 문제는 회피해버린다.

느림에 익숙해진 정부를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민을 두려워하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의 빠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느린 정부는 외면당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 한국의 고령화 문제는 물리적 나이 문제뿐만 아니라 시민과 정부의 ‘생각 나이’의 격차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