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한재민 등 주요 콩쿠르 휩쓴 연주자 줄줄이 배출
"뛰어난 기교만으로 우승 어려워…한예종 학생들, 열정과 소명의식 강해"
"예술에 재능 있다면 자녀 행복 위해 재능 키워 주시길"
한예종 음악원장 이강호 교수 "예술에 미친 친구들이 여기 와요"
"윤찬이는 몇 년 전 입시를 할 때만 해도 정말 잘하는 친구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스타가 됐잖아요.

학생들이 몇 년 사이에 성장하는 걸 보면 저도 참 신기하고 경이롭습니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인 이강호 교수는 전공이 첼로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막역한 사이인 '신동' 첼리스트 한재민을 지도해온 그는 임윤찬과 한재민 등 한예종 학생들이 부단한 단련 끝에 세계적인 콩쿠르를 휩쓸며 한 사람의 어엿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

지난달 28일 한예종 서초캠퍼스 음악원장실에서 만난 그는 한예종 재학생이나 졸업한 연주자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두각을 보이는 배경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열정"이라고 답했다.

"(예술에) 미치지 않으면 제 생각에는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 같아요.

학생과 교수 모두가요.

'내가 정말 예술을 사랑하고, 이게 내 소명이고 존재 이유'라 믿는 학생들, 열정과 목적의식이 뚜렷한 친구들이 여기에 오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경쟁하고, 격려하고 위안도 받으면서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이지요.

"
지난해 세계적 권위의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이 대회 60년 역사상 최연소(만 18세)로 우승하며 클래식계에 파란을 일으킨 임윤찬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예종 기악과에서 피아니스트인 손민수 교수의 지도를 12세 때부터 받아온 임윤찬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주저 없이 손 교수를 꼽아왔다.

이 교수가 지도하고 있는 첼리스트 한재민 역시 마찬가지. 한재민은 2021년 제오르제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와 제네바 콩쿠르 3위에 오른 뒤 지난해에는 윤이상 국제콩쿠르에서 만 16세의 나이로 우승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한예종 음악원장 이강호 교수 "예술에 미친 친구들이 여기 와요"
한예종 음악원은 이처럼 어려서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을 산하의 영재교육원을 통해 일찌감치 발굴한 뒤 실기 위주로 집중적인 도제식 교육을 하는 체계가 잘 갖춰져 있기로 유명하다.

기악 전공생의 시험 과제곡 분량이 타 음대에 견줘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도 악명 높다.

일례로 한예종 음악원 피아노 전공은 40여 분의 독주곡을 모든 학생이 소화해야 해서 실기 시험만 1주일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첼로도 비슷해요.

협주곡과 소나타 전악장, 솔로곡 1~2개를 해서 보통 국내 주요 콩쿠르의 1~3차에서 요구하는 곡들을 모두 합친 정도의 과제물을 줍니다.

분량으로는 1시간 20분 정도죠. 예고(예술고교) 졸업 후 갓 입학한 학생들은 첫 학기에 상당히 힘들어들 해요.

"
이렇게 한예종에서 1~2년 공부하다 보면 웬만한 국제 콩쿠르에 나가도 될 정도의 레퍼토리가 쌓이게 되고 대부분의 콩쿠르 과제곡들은 이미 공부를 많이 해놓은 상태가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내공'을 갖추고 콩쿠르에 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콩쿠르에 나갈 때가 되면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자신만의 음악적 개성과 존재감을 담는 노력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다른 학교들과 차별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
그러나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 등 서구에서는 한국 학생들이 기교를 갈고 닦는 데만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기교가 뛰어난 것으로 상위 입상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심사위원들도 연주자가 가진 그 무언가에 설득이 되지 않으면 1등은 힘들다"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예원학교 재학 중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스워스모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예일대 석사를 거쳐 보스턴의 명문 뉴잉글랜드음악원(NEC)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예종 음악원장 이강호 교수 "예술에 미친 친구들이 여기 와요"
유년 시절부터 갈고 닦은 첼로를 비롯한 음악 실기와 이론에 더해 경제학까지 폭넓게 공부한 그는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돼 정년(테뉴어)을 보장받고 기악과장 보직까지 맡았지만 2010년 이를 모두 뒤로 하고 짐을 싸 귀국했다.

"한예종이기 때문에 왔어요.

미국에서 편하게 살려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가장 재능과 열정이 있는 학생들과 함께할 수 있기에 이곳을 택했습니다.

이런 학생들과 같이 좋은 음악을 만들고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복이에요.

"
한예종 출신 스타 연주자들이 줄줄이 나오는 배경으로 그는 명시적인 교육과정(커리큘럼) 외에도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학교라는 독특한 학교 분위기를 들었다.

"일종의 '숨겨진 커리큘럼' 같은 건데요.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지만 자기 창작이나 연주 활동도 왕성히 하거든요.

학생들이 '아, 예술가의 삶은 저런 거구나' 하고 느낄 기회가 많지요.

학생들도 학점에 상관없이 학업 외에도 친구들과 앙상블을 조직해 새벽같이 모여 연습하고 연주회를 자기들끼리 기획해요.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한예종을 한예종으로 만드는 거라고 봅니다.

"
한예종은 개교 30주년인 작년부터 설치법 제정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991년 통과된 '한국예술종합학교설치령'에 근거해 만들어진 한예종은 현재 고등교육법상 대학이 아닌 '각종 학교'에 해당해 대학원 설립이나 석·박사 학위 수여가 불가능하다.

석사 과정에 해당하는 예술전문사 과정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이를 수료해도 석사학위는 받을 수 없고 상급학교의 박사 과정 입학 시에만 석사학위에 상응하는 학력으로 인정된다.

"최근에 전 세계 예술대학 중에 우리 학교만큼 성과를 낸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법적인 제도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취업이나 진학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어요.

이건 옳지 않은 상황이에요.

"
한예종 음악원장 이강호 교수 "예술에 미친 친구들이 여기 와요"
임윤찬이나 한재민에 앞서 손열음, 김선욱, 임지영, 박재홍, 문지영 등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휩쓸며 주목받았지만, 한국의 전반적인 클래식음악 시장이나 문화의 저변 확대는 아직 요원한 일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한국이 많은 분야에서 압축성장을 했습니다만, 문화 향유 같은 경험은 압축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어요.

갑자기 우리가 자다 일어나서 문화적 경험을 폭넓고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문화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행복이라는 혜택이 사회에 널리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서양보다 클래식 관객 중에 젊은 층이 많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 같아요.

"
예술은 행복이라고도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어려서 아이가 음악이나 다른 예술에 재능을 보인다면 부모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녀의 '행복'을 위해 재능을 키워주라는 말도 했다.

"재능이 있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음악을 못 하게 되면 앞으로의 삶이 불행해질 수 있어요.

음악가의 삶이 외롭고 힘들까 봐 부모는 두려울 수 있지요.

그래서 어떤 면에선 우리가 예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이 우리를 택하는 거라고 봅니다.

"
한예종 음악원장 이강호 교수 "예술에 미친 친구들이 여기 와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