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을 꾸고 있던 서방, 특히 유럽 국가들의 면전에다 지정학적 찬물(geopolitical ice bucket)을 들이부은 격이다."
유럽의 한 외무장관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작년 2월 24일)에 대해 최근 이렇게 표현했다. 냉전이 종식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는 다자주의 체제가 지속될 것이란 서방국가들의 백일몽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부서졌다는 의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신(新)냉전 시대가 본격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달 중순 독일에서 열렸던 뮌헨안보회의가 이를 단적으로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냉전시대가 끝난 1990년대 이후 만들어진 국제 회의에 올해 처음으로 러시아가 불참했다"며 "이는 새로운 냉전의 신호탄"이라고 전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지전을 넘어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영국은 서방 주요국 가운데 처음으로 중(重)전차 챌린저2의 우크라이나 지원 방침을 밝혔다. 영국 정부의 결정 이후 미국(M1 에이브럼스)과 독일(레오파르트2)도 각각 자국 육군의 주력 전차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키로 했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은 이제 탱크를 넘어 전투기를 지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는 서방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를 돕기 위한 '느슨한 동맹'이 구축되는 양상이다. 자원 부국인 러시아는 그간 막대한 에너지 자원 등을 수출해 재정을 충당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유럽과 G7(주요 7개국) 정상들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거나 가격상한제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가하자 우회로를 찾아냈다.
최근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인도가 시중에 값싸게 풀린 러시아산 원유를 대거 빨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국가는 과거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이 이용했던 '검은 경로'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다. 서방 제재국들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을 둘러싼 긴장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 보호무역 전쟁이 커지는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켜본 중국이 러시아를 북돋는 한편, 자신들의 대만 침략 시나리오의 실행 가능성을 한층 높이면서다. 최근 미국 상공을 침범했다가 격추된 중국 정찰풍선 사건도 양국 간 갈등을 키우고 있다.
냉전 종말과 국제 평화를 선언했던 국가 지도자들과 석학들은 신냉전의 서막을 경고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지난해 말 한 인터뷰에서 "냉전은 결코 종식된 게 아니었다"며 "독일도 군사력을 증강했어야 했다"고 공개 반성문을 썼다. 31년 전 출간한 저서 '역사의 종말'을 통해 사회주의 붕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통찰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도 이 같은 반성 행렬에 동참했다.
그는 최근 영국 정치 주간지 뉴스테이츠먼과의 인터뷰를 통해 "'역사의 종말'이 틀렸다는 일각의 주장을 기꺼이 인정한다"고 했다. 이어 "나의 최후의 악몽은 중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격려하고, 러시아가 대만을 침공하는 중국 편에 서는 등 중국과 러시아가 서로 협력하는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도 "세계대전 양상의 위험성이 커졌다"며 "중국, 러시아 등 반(反)서방 세력이 세계 2차대전의 추축국처럼 동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과 동맹국들이 이를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만났다. 푸틴 대통령은 왕 위원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러시아 방문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양국간 관계 강화가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중·러간 긴장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2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스푸트니크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왕 위원을 만나 “시 주석의 러시아 방문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 정세가 어렵다”며 “양국 협력이 국제 정세의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사실상 왕 위원에게 시 주석의 러시아 방문에 대한 ‘러브콜’을 낸 셈이다.푸틴 대통령은 “양국 간 교역이 예상보다 좋다”며 “(교역 규모가) 지난해 1850억달러였지만 곧 2000억달러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모든 것이 발전하고 있다”며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왕 위원도 화답했다. 그는 “시 주석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며 “양국의 전략적 협업 관계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 위원은 “다른 국가는 우리(중국과 러시아) 관계에 압력을 가할 수 없다”며 “우리는 국제 관계에서 다극화와 민주화를 함께 지지한다”고 덧붙였다.왕 위원은 이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도 만나 “양국 상호 이익에 대한 주제와 관련해 의견을 나눌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새 협정을 맺기를 고대한다”는 뜻도 밝혔지만 협정에 대한 세부 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서방은 중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국제 사회의 긴장을 심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날 미국 방송인 NBC는 “지금까진 중국이 섬세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갈등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점점 더 긴장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로이터통신은 “미국은 ‘중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무기 공급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와 중국, 우크라이나와 미국 주도의 NATO 군사동맹 간 대결로 확대될 가능성을 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24일)을 앞두고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르면 오는 4월 러시아를 방문해 평화협상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수세에 몰린 러시아는 미국과의 핵군축조약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지 하루도 안 돼 “미국의 태도에 따라 복귀하겠다”며 혼선을 빚었다. 시진핑, 평화협상 촉구 나서나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에 따르면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푸틴 대통령은 왕 위원에게 “시 주석의 러시아 방문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왕 위원에게 시 주석에 대한 ‘러브콜’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 정세가 어렵다”며 “양국 협력은 국제 정세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왕 위원도 “시 주석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며 “양국의 전략적 협업 관계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화답했다.서방 언론들도 시 주석의 방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 시 주석이 몇 개월 안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계획이라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시 주석은 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다자 평화 대화를 촉구하고 핵무기 사용 반대 입장을 거듭 강조할 것이라고 WSJ는 전했다.구체적인 방러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4월 또는 러시아의 건승기념일(5월 9일) 전인 5월 초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3월엔 중국 최대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열리기 때문이다.중국은 최근 분쟁 종식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서방의 질타를 받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왕 위원은 지난 18일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을 만나 “우크라이나 위기가 장기화하고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WSJ는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전쟁을 몇 주 앞두고 만나 ‘한계 없는’ 우정을 보여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며 “중국의 입장 선회는 상당히 중대한 변화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중국이 분쟁 중재자를 자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초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기 위한 6자회담을 주도했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쑨윈 중국프로그램 국장은 이와 관련해 “중국은 단지 평화를 촉구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쟁 종결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러 “美 성의 보이면 핵군축조약 복귀”우크라이나전쟁 장기화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는 러시아는 핵군축조약 중단을 선언한 지 하루도 안 돼 한발 물러섰다. 러시아 외교부는 21일 “미국이 정치적 긴장 완화를 위한 선의를 보이면 핵군축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참여 중단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고 밝혔다.이와 함께 “조약에 따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계획을 앞으로도 미국에 통보하고, 핵무기 양적 제한도 준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푸틴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핵군축조약 참여 중단을 발표했다. 푸틴이 갑작스럽게 핵군축조약 참여 중단 카드를 꺼낸 건 미국과 서방을 압박해 유리한 종전 선언을 이끌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22일 러시아 상·하원 의회는 각각 핵군축조약 참여를 중단하는 내용의 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들은 전날 “러시아의 무책임한 핵 관련 발언”이라며 규탄 성명을 냈다.한편 러시아가 2030년까지 우방이자 이웃 나라인 벨라루스를 통합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우크라이나 매체 키이우인디펜던트는 미국과 유럽의 언론사들이 이런 내용을 담은 러시아 비밀문서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군을 배치해 우크라이나 북쪽 국경을 통해 공세를 벌일 것이란 가능성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
우크라이나를 돕는 세계 각국 중 한국이 일본보다 다소 적극적이라는 분석이 나왔다.영국 텔레그래프는 21일(현지시간)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세계 57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정도를 평가한 결과를 발표했다.텔레그래프는 각국의 대러시아 무역,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군사적 지원, 중화기 제공 현황에 각각 1~4점을 부과한 뒤 이를 평균 내 비교했다. 대러 수입액의 경우 전쟁 전 3년 동안의 평균과 비교했고, 각국이 밝힌 우크라이나 지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과 대비해 산정했다. 중화기 제공 규모는 나라마다 보유한 물량에 대비했다.분석 결과, 3점대 이상으로 '적극 지지 국가'로 분류된 나라는 폴란드·영국·체코·노르웨이·미국 등 18국이었다.한국은 2점대로 벨기에·룩셈부르크·크로아티아·호주·그리스·스페인 등 11개국 사이에 이름을 올렸다.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헝가리·튀르키예 등 12개국이 속한 1.25~2점대로 분류됐다.우크라이나를 가장 소극적으로 지지한 15국엔 우즈베키스탄·멕시코·이집트·세르비아·중국·이스라엘·인도 등 15개국이 있었다.우크라이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나타난 폴란드의 경우, 경제적 지원 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 3위인 것으로 조사됐다. 영국은 전후 러시아산 수입을 약 97%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은 GDP의 1% 이상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해 적극적이었다. 체코는 보유 전차의 20%를 제공하기로 했다.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우크라이나 지원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나라는 헝가리였다. 헝가리의 지난해 11월 기준 러시아산 수입량은 전쟁 전 3년 평균보다 262% 많았고, 우크라이나에 개별적으로 제공한 군사·인도주의적 지원은 거의 없었다고 텔레그래프는 밝혔다.슬로베니아·불가리아·그리스·스페인 등 EU 회원국 다섯 곳은 전후 러시아산 가스 등 수입이 50% 이상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인도의 경우 러시아산 원유 등 수입액이 지난해 9월 13억 달러(약 1조7000억원) 규모로 전쟁 전의 8배가량으로 급증했고, 중국도 약 40% 증가해 90억달러(약 11조7000억원) 규모에 육박했다. 텔레그래프는 "두 나라(인도·중국)는 GDP에 비해 사실상 무의미한 인도주의적 원조를 보냈다"고 강조했다.텔레그래프는 프랑스 등 일부 국가는 분석 대상 기간 중 수입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이번 분석에서 제외됐다고 전했다.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greaterf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