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브루넬레스키의 돔' 쓴 역사가가 조명한 르네상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이다.

이창동·박찬욱·봉준호·홍상수·류승완 등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우후죽순 나왔다는 점에서다.

이들은 문화원을 전전하거나 복제 비디오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박찬욱 감독은 대학 1년 때 어렵사리 김기영 감독의 '화녀 82'를 보고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고, 봉준호 감독도 학창 시절 '문화학교 서울'이나 '영화공간 1895' 같은 영화 배움터를 찾아다니며 영화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하려 했다.

책도 별반 없었다.

봉 감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원서를 복사한 프린트를 가지고 내용을 전부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요컨대 결핍은 그들 문화의 자양분이었고, 상상력의 보고였다.

결핍 속에 꽃피운 르네상스…신간 '피렌체 서점 이야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로마 고전들은 대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지식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포조 브라촐리니(1380~1459)는 수도원을 돌아다니며 그리스와 로마 고전을 찾아다녔다.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500년 넘게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찾았다.

그는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필사해 피렌체로 보냈다.

포조 같은 이른바 '책 사냥꾼'이 늘면서 피렌체는 점점 '아르노강변(피렌체를 가로지르는 강)의 아테네'가 되어가고 있었다.

베스트셀러 '브루넬레스키의 돔'의 작가이자 역사 연구가인 로스 킹이 쓴 신간 '피렌체 서점 이야기'(책과함께)는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지식 파수꾼들의 삶을 통해 르네상스의 탄생과 부흥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책 사냥꾼 포조를 비롯해 피렌체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장서가라 불린 니콜로 니콜리, 르네상스 초기 대표적 인문학자 레오나르도 브루니, 학자들의 재정적 후원자 코시모 데 메디치, 그리고 이들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서적상의 왕'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의 활약을 소개한다.

결핍 속에 꽃피운 르네상스…신간 '피렌체 서점 이야기'
15세기 피렌체에는 건축에서 르네상스 양식을 완성한 브루넬레스키와 화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벌레가 들끓고 먼지와 검댕이 쌓인 서가를 뒤지며 희귀 필사본을 찾던 책 사냥꾼,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옮긴 학자들, 좋은 서체로 책을 필사하던 필경사들, 지면의 빈 곳에 정성스레 금박을 붙이고 장식 그림을 그리는 세밀화가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주선하고 감독한 서적상이 있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서적상 베스파시아노는 1천 권이 넘는 책을 제작해 판매했으며 그의 서점은 인문주의자들의 토론과 만남의 장이 됐다.

지적 능력이 탁월했던 니콜로 니콜리가 북 토크를 주도했는데, 서점을 찾은 젊은이들은 니콜리가 그만 내려놓으라고 할 때까지 푹 빠져서 필사본을 읽었다고 한다.

'피렌체 최고의 다독가' 카를로 마르슈피니는 공개 강연에서 그때까지 알려진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을 빠짐없이 인용하는 박학다식을 과시하기도 했다.

결핍 속에 꽃피운 르네상스…신간 '피렌체 서점 이야기'
이렇게 피렌체는 학문의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으로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놓인 동로마 황제와 신하들이 원조 요청을 위해 피렌체를 방문했는데, 이들은 피렌체의 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황제를 수행한 동로마 철학자 스콜라리오스는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한때 야만인으로 간주했던 수세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제는 학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고 썼다.

아울러 그리스어를 쓰는 동로마 학자들이 유입되면서 플라톤, 디오게네스 등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플라톤의 유행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근간으로 한 중세 신학 체계를 흔들었다.

결핍 속에 꽃피운 르네상스…신간 '피렌체 서점 이야기'
고전을 소개하고 북 토크 등 문화행사를 기획한 베스파시아노는 이렇게 피렌체 르네상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현재 그의 흔적은 피렌체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서점은 피자 가게가 돼 있고, 그의 이름은 산타 크로체 성당의 작은 명판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저자는 "베스파시아노는 과거의 지혜를 다시 포착하고 그것을 현재를 위해, 페트라르카의 손자들이 믿은 것처럼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되살리고자 했던 꿈의 적극적인 협력자였다"고 평한다.

"모든 악은 무지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작가들은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게 비쳐왔다.

"(베스파시아노)
최파일 옮김. 640쪽.
결핍 속에 꽃피운 르네상스…신간 '피렌체 서점 이야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