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3에서 한 참가자가 햅트X의 촉각 장갑을 체험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5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3에서 한 참가자가 햅트X의 촉각 장갑을 체험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부드럽게 휘어지는 갈대의 촉감, 배를 관통하는 총알의 충격, 화재현장의 뜨거운 불길…

5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3’에는 시각 너머의 오감을 자극하는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장비들이 대거 등장했다. 가상세계가 ‘발전된 영상’ 수준에 그친다는 비판을 극복하고, 진짜같은 허구를 만들기 위해 촉각까지 총동원하는 것이다.

기자가 이번 CES에서 체험한 VR 촉각 장비 중 가장 주목할만한 4가지를 추려봤다. 실제 착용했을 때 각 기기가 얼마나 현실감을 구현하는지, 사용된 핵심 기술은 무엇인지를 상세히 정리했다. 제품의 가격과 어떤 경우에 쓰면 좋을지도 덧붙였다.

고양이털은 부드럽게, 자동차는 매끈하게...극한의 현실감

▶제품: 햅트X의 VR용 촉감 장갑 ‘Gloves G1’
▶현실감: 5점 만점에 5점
▶가격: 2400달러 이상(302만원)
▶누가 쓰면 좋을까: 제조업 등 직무 훈련이 필요한 기업. 게이밍에는 아직 부적합.

기자가 체험해본 기기 중 가장 ‘리얼’하다. 햅트X 측도 자신있게 ‘현존하는 가장 진짜같은 VR 장갑’이라고 홍보한다. 세밀한 자극은, 다른 업체의 장비와 아예 수준이 다르다.

가장 큰 특징은 물체의 재질에 따라 달라지는 촉감이 구현된다는 점이다. 이 장갑을 끼면 매끈하고 딱딱한 자동차와 휘어지는 갈대,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 감촉이 서로 구분된다. 손 위를 기어다니는 거미의 뾰족한 다리, 톱니바퀴의 틈새까지 느껴진다.

기술의 핵심은 수많은 공기방울. 손가락은 물론 손등, 손바닥을 모두 감싸는 135개의 ‘공기방울’을 채웠다 비우며 세밀하게 촉각을 자극한다. 다른 업체의 장갑들은 한 손가락 끝에 하나씩, 총 10개의 촉각 포인트를 배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 전체를 수많은 포인트로 감싸는 장비는 햅트X가 유일했다.
미세한 공기방울에 공기를 넣고 빼면서 압력을 가한다.
미세한 공기방울에 공기를 넣고 빼면서 압력을 가한다.
물체의 무게와 저항도 구현된다. 손으로 가상세계의 벽을 밀어보면, 마치 실제 벽이 버티고 서있는 듯 쉽게 밀리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누르면, 실제로 딱딱한 테이블이 있는 듯 눌리지 않는다. 돌맹이를 집어들면 그 무게가 느껴진다. 장갑 겉에 장력 있는 엑소스켈레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 손당 18kg의 무게가 발생시키는 저항이 구현된다.

다만 일반 게임 플레이어가 사용하긴 부적합하다. 너무 비싸고, 무겁고, 연동되는 게임도 없기 때문이다. 장갑과 소프트웨어, 에어팩을 모두 합치면 2400달러(302만원 가량)가 넘어간다. 등장갑에 공기를 주입하기 위한 에어팩은 무겁고, 에어팩과 장갑을 연결하는 선은 거추장스럽다. 자유롭게 움직이며 게임을 할 수 없다는 뜻. 햅트X 측에서도 B2C로 개인 고객에게 물건을 판매할 계획이 없다.

타겟 고객은 제조업 등에서 직업 훈련이 필요한 기업이다. 자동차나 선박 제조업, 외과 수술 등에서 가상 훈련을 하는데 쓰는 목적이다. 실물로 훈련하려면 진짜 자동차 프레임, 해부용 시신 등이 필요하지만 가상세계에선 모델만 구현하면 된다. 실제 훈련보다 돈이 적게 들고, 안전하게 위기 상황을 시험해볼 수 있다는 게 장점. 또 한 번 가상세계를 만들어 놓으면 향후 적은 비용으로 모델을 조금 수정해 다양한 상황에서 훈련을 할 수 있다.
햅트X의 촉각 장갑을 체험하고 있는 참가자. '현존하는 가장 사실적인 VR 장갑'이라는 홍보 문구에 걸맞게, 세심한 자극을 느낄 수 있다.
햅트X의 촉각 장갑을 체험하고 있는 참가자. '현존하는 가장 사실적인 VR 장갑'이라는 홍보 문구에 걸맞게, 세심한 자극을 느낄 수 있다.
자동차 디자인에도 쓰인다. 일본의 자동차 기업인 닛산은 차 내부를 디자인한 후, 햅트X의 장갑을 사용해 디자인 시안을 체험해본다. 비싸고, 만드는데 오래 걸리는 실물 크기의 프로토타입 자동차를 만들어 체험하는 대신 가상현실에 3D 모델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후 디자이너는 햅트X의 장갑을 이용해 가상세계에서 핸들을 돌려보고, 볼륨 다이얼을 조정하는 등 자신의 디자인을 체험하고, 수정할 수 있다. 고칠 부분이 있다면 비싼 시제품을 또 만드는 대신, 3D 모델만 바꿔 다시 시험해볼 수 있다.

제이크 루빈 햅트X CEO는 “실제 모델은 비싸고, 한번 쓰고 나면 더 쓸 수도 없고, 기존의 VR 컨트롤러는 너무 부자연스러워 사실적인 피드백이 어렵다”며 “햅트X 장갑을 사용하면 디자인 과정 내내 디자이너가 차량 모델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빠르게 디자인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표절 시비도 진행 중이다. 빅테크 기업이 햅트X의 제품을 베꼈다는 것. 2021년 11월, 메타(전 페이스북)가 AR/VR용 촉각 글러브 시제품을 공개하자 햅트X 측은 “메타가 우리 제품을 베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성명서에서 루빈 CEO는 “우리가 메타의 개발자들에게 여러번 보여준 기술을 메타가 허락없이 베꼈다”고 지적했다.

전기 자극으로 강렬한 게임적 재미를


▶제품: OWO의 VR용 촉각 수트
▶현실감: 5점 만점에 4.5점
▶가격: 399유로(53만원)
▶누가 쓰면 좋을까: 강렬한 슈팅, 격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
▶CES 2023, 2022 게이밍 부문 혁신상 수상

가장 강렬한 게임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제품. 촉각 수트에 전기 펄스를 사용한 게 특징이다. 촉각 제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자극원인 진동 대신이다. 진동은 자극이 피부 밖에서 멈춘다면, 전기 펄스는 피부 속까지 자극이 침투하는 느낌이다.

목과 어깨에 붙여서 쓰는 저주파 안마기의 찌릿한 느낌과도 비슷하다. 저주파 안마기와 마찬가지로 장치를 직접 피부에 밀착시켜야 하기 때문에, 대다수 VR 수트와 달리 옷을 모두 벗고 피부 바로 위에 입는다. 사전 설정에서 자극을 0~15 단계로 조정할 수 있는데, 기자는 7~10단계를 택했다. 이 정도만 단계만 돼도 자극에 깜짝 놀랄 정도다.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까지 느낀다…VR햅틱 수트 진화 [CES 2023]
햅트X처럼 가장 사실적인 느낌을 구현하는 제품은 아니다. 전기 자극이 실제 감각과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이 강렬한 느낌 자체가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재밌다. 진동을 사용하는 촉각 수트보다는 현실적이다. 총알에 맞는 느낌과 단검에 찔리는 느낌이 서로 구분되는 수준이다. 진동 장비에서는 이 차이가 구현되지 않는다. 전기 자극이 몸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총알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느낌도 구현된다.

저렴한 가격과 편리성도 장점이다. 사전예약 판매로 399유로(53만원) 수준이라, 여타 촉각 수트보다 저렴하다. 수트가 옷처럼 가볍고 얇기 때문에 보관하거나 입고 활동하기도 편하다. 다른 진동 촉각 수트가 두껍고 무거운 것과 다른 점이다. 포트나이트, 발로란트, 배틀그라운드, 비트세이버 등과 일부 연동된다.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까지 느낀다…VR햅틱 수트 진화 [CES 2023]

빗방울 맞으며 숲을 거닐고 싶다면

▶제품: 액트로니카의 VR용 촉각 수트, ‘스키네틱’
▶현실감: 5점 만점에 4점
▶가격: 789유로(105만원)
▶누가 쓰면 좋을까: 감성 게임, 영화를 즐기는 사람. VR 영상을 상영하는 업체.
▶CES 2023 VR, AR 부문 혁신상 수상

총알이 난사되는 게임보다는, 세심하고 감성적인 컨텐츠를 즐기고 싶다면 적합한 제품. 진동을 자극원으로 사용하지만, 진폭을 다양화해 타사 제품보다 보다 현실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다.

기자가 체험한 데모 버전에서는 가상세계 속 총알, 화염, 빗방울 세가지 자극이 제공됐다. 이 중 빗방울이 가장 현실감 있었다. 하늘에서 서로 다른 굵기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몸에 떨어졌고, 등을 굽히거나 하늘을 바라볼 때 바뀌는 몸의 각도에 따라 빗방울 자극의 위치도 변했다. 총알의 경우 진동을 활용한 타사 제품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액트로니카의 '스키네틱'은 사용자의 행동, 자세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촉감을 자극한다. 등을 굽히면 가상세계 속 빗방울은 등에만 떨어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팍에만 떨어진다.
액트로니카의 '스키네틱'은 사용자의 행동, 자세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촉감을 자극한다. 등을 굽히면 가상세계 속 빗방울은 등에만 떨어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팍에만 떨어진다.
아직 다른 컨텐츠와의 연동은 부족하다. 다양한 진폭을 사용하는 탓에 연동 과정이 복잡해서다. 영화 등 영상 컨텐츠와의 연동은 더 빨리 가능할 전망이다. 실시간으로 사용자의 자세나 행위를 파악해 즉각적으로 진동자극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타임라인에 맞춰 특정 자극을 가하도록 미리 셋팅해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자는 전시장에서 수트를 활용해 영화 ‘아바타1’을 감상하기도 했다. 주인공이 탑승한 헬리콥터의 진동, 숲을 가로지르며 달려갈 때 느껴지는 풀의 감촉 등이 세심하게 전해졌다. 액트로니카 측도 개인 게이머보다는 VR 영상을 상영하는 업체부터 공략할 계획이다.

다양한 게임 즐기고 싶다면

▶제품: 비햅틱의 VR용 촉각 수트/장갑, ‘택트 수트/글러브’
▶현실감: 5점 만점에 3.5점
▶가격: 299~499달러(37만~62만원)
▶누가 쓰면 좋을까: 다양한 게임에 수트를 연동하고 싶은 게이머. 음악, 슈팅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
▶CES 2021 VR, AR 부문 혁신상 수상

가장 많은 게임과 연동되는 장비다. 아무리 장비의 현실감이 뛰어나도, 장비를 이용해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없다면 무용지물. 비햅틱스는 빠르게 제품 상용화에 성공해 VR 수트 시장을 선점하고, 다양한 컨텐츠와 연동에 성공했다. 기기와 컨텐츠를 연결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도 함께 개발한다.

CES 전시장에서 만난 곽기욱 비햅틱스 대표는 “업계에 많은 VR 수트와 장갑이 나왔지만, 이렇게 높은 수준의 상용화를 이룬 제품은 우리가 유일하다”며 “다양한 컨텐츠와 연동되기 때문에 게이머들의 활용도가 매우 높을 것”이라고 했다.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까지 느낀다…VR햅틱 수트 진화 [CES 2023]
비햅틱스 제품은 진동을 활용한다. 아직 상용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다른 제품들과 비교하면 현실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게임을 즐기기엔 충분한 감각이다. 가상현실 속 물체와 내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슈팅 게임이나 음악 게임, 감상에 잘 어울린다. 총의 타격감이나 음악의 울림이 비햅틱스 제품의 진동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스베이거스=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