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작가가 버려진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로 작업한 ‘민들레’(2022)
최정화 작가가 버려진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로 작업한 ‘민들레’(2022)
영하 10도의 한파가 찾아온 14일 아침. 서울 강남 한복판에 형형색색의 ‘민들레’ 꽃이 활짝 피었다. 지름 2m가 넘는 거대한 꽃봉오리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붉고 푸르게 시시각각 색을 뽐낸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최정화 작가(51)의 신작. 6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구슬들이 서로 이어져 하나의 빛나는 행성처럼 보인다. 구슬은 모두 버려진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로 만들었다.

누군가에겐 하루의 에너지가, 누군가에겐 소중한 인연을 이어준 끈이 되었던 그것이 이제 새로운 생명의 온기를 전하는 예술 작품이 된 셈이다. 오는 22일까지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에서 열리는 ‘새 생(生), VITA NOVA’ 전시는 네스프레소와 최 작가가 약 1년간 협업한 결과다. ‘민들레’ 외에도 ‘알케미’ ‘자이르’ ‘인피니티’ ‘기둥은 기둥이다’ 등 신작들이 대거 전시됐다. 작가는 새생, 싱싱, 생생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눠 공존과 공생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이야기는 야외 공간과 이어지는 2층과 3층의 전시장까지 이어진다. 공간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세트장처럼 보인다.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올린 ‘生’

현대미술가 최정화 작가
현대미술가 최정화 작가
최 작가는 30년간 버려진 것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 버려진 고가구, 망가진 그릇, 공사장에서 뒹구는 폐자재 등이 그에게는 모두 예술의 재료였다. “예술은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밑에, 우리 옆에, 우리 곁에 있는 것이 모두 예술이다”고 말하는 작가는 그의 작품세계를 단지 재활용의 개념을 넘어 생명과 삶에 관한 서사로 해석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플라스틱과 쓰레기도 어쩌면 자연의 일부라고 그는 말한다.

전시를 앞두고 서울 종로구 연지동 작업실에서 만난 최 작가는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커피 캡슐 더미와 씨름해야 했다”고 했다. 세제로 일일이 세척해 말리는 작업에만 1주일이 넘게 걸렸다고. 이후에는 색색의 커피 캡슐들을 손으로 구기고 두드려 핀으로 고정하는 ‘막노동’을 해야 했다.

경기 파주 스튜디오에 있는 그의 팀 ‘철인’과 함께 수개월에 걸쳐 작업에 매달렸다. 이전 작품들이 그릇들을 수직으로 쌓고 수평으로 연결해 하나의 행성이 된 것처럼 이번엔 커피 캡슐이 그 역할을 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 기념작으로 만든 높이 12m의 대형 조형물 ‘컴 투게더(Come Together)’의 모습과도 닮았다.

“커피 캡슐이 하나의 그릇이라고 생각했어요. 밥그릇처럼요. 카타르 작업 때도 금속으로 축구공을 제작하고 카타르 가정에서 쓰던 냄비, 작업자들의 작업모를 연결해 방사형의 꽃봉오리를 완성했죠. 민들레를 잡초라고 하지만 사실 민들레는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귀한 식물입니다. 강인한 생명력과 담대한 상상력이, 희망과 번영의 상징이거든요.”

○커피 캡슐로 말하는 공생과 공존

14일 개막한 ‘새 생(生), VITA NOVA’ 전시장에 놓인 ‘기둥은 기둥이다’와 ‘자이르’.
14일 개막한 ‘새 생(生), VITA NOVA’ 전시장에 놓인 ‘기둥은 기둥이다’와 ‘자이르’.
최 작가는 이번 전시 제목을 ‘새 생, VITA NOVA’라고 직접 지었다. 말 그대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재료는 바뀌었지만 그가 말하는 주제는 한결같다. ‘공생’과 ‘공존’이다. 일상 속의 알루미늄 캡슐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일회용이 아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했다.

최 작가의 이런 생각은 네스프레소가 2011년부터 버려지는 커피 캡슐을 무상으로 수거하고, 이를 재활용해온 활동과도 맞닿아 있다. 전시장 입구엔 ‘함께 만드는 꽃밭’이라는 이름의 화단이 꾸며졌다. 소비자들이 직접 커피 캡슐을 재활용해 만든 꽃과 나비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탑 시리즈가 전시된 ‘싱싱’의 방.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밥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행위를 그는 예술로 승화했다. 일상의 재료들을 쌓아올려 ‘마음의 탑’을 지은 작가의 작품들은 바닥부터 천장, 벽면까지 반사 재료로 뒤덮인 공간에서 화려한 빛을 받는다. 그 어느 보석보다 빛나는 조형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버려진 커피 캡슐과의 작업에 대해 최 작가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밀도 있는 결과물이 탄생했다”고 했다. 한참을 작업하며 평생을 함께해온 커피에 대한 생각도 정리했다.

‘매일 아침 작업실에 오면 제일 먼저 옥상에 올라가 화분에 물을 주고, 그런 다음 나에게도 물을 주는 의미로 커피를 한 잔 마신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2층 테이블에는 나의 작품 중 하나인 ‘인피니티’가 있다. 세상의 시간은 인피니티처럼 무한대로 이어진다. 어디서 언제 누구와 이어질지 모르는 게 세상이다. 세상은 모든 게 만남이다. 커피를 통해서 나는 나를 만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김보라/이선아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