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현실화하는 '빅블러' 리스크
‘빅블러(big blur)’. 최근 금융업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디지털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산업 간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뜻한다. 네이버 카카오 등 빅테크는 결제 송금뿐 아니라 예금 대출 보험 등 금융 서비스 전반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정부도 금산분리를 완화해 은행 등 금융회사의 정보기술(IT) 산업 진출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금융 분야에서 빅블러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빅테크 금융 문턱 낮췄지만

빅테크의 금융 서비스 진출은 국내 금융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빅테크는 기존 서비스를 바탕으로 쌓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정된 금융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 금융회사에서 독점적으로 이뤄져 온 금융 서비스의 문턱을 대폭 낮추고 사용자 경험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간편 송금 서비스를 처음으로 선보인 토스와 자체 개발한 신용평가시스템을 활용해 국내 첫 온라인 사업자 전용 신용 대출 상품을 출시한 네이버파이낸셜, 공인인증서를 없애고 간편 소액 대출상품을 내놓은 카카오뱅크에 많은 금융 소비자가 환호했다.

은행 보험사 카드회사 등 전통 금융회사도 빅테크의 공습에 맞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 왔다. KB·신한·하나·우리·농협금융 등 금융지주는 모든 계열사 서비스를 하나의 앱에 담아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증권 등 삼성 계열 금융사는 삼성금융네트웍스라는 공동 브랜드를 출범하고 네 개사의 서비스를 한 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 통합 앱을 출시하기도 했다. 카드사들도 빅테크의 간편 결제 서비스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으로 간편 결제 서비스를 내놓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빅블러 현상이 갈수록 빨라지면서 소비자의 편의성이 높아지고 금융 분야에서 더 많은 혁신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비금융에서 금융으로 위험 전이

하지만 한편으론 빅블러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빅테크에 의한 자금 중개가 확대되면 네트워크 외부 효과로 시장 지배력이 커져 독과점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고, 이를 이용한 반경쟁적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 부문에서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한 플랫폼 기업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금융시장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15일 경기 판교 SK C&C 데이터센터 화재에 따른 카카오 서비스 중단으로 카카오페이의 송금·결제 등 일부 연계 금융 서비스가 먹통이 되면서 이런 우려는 현실화했다. 비금융업자의 리스크가 언제든지 금융권으로 전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IT 기업 등 비금융업자가 금융업에 진출하거나, 반대로 금융사가 핀테크 등 IT 분야에 진출하는 일이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어 비슷한 금융사고는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시장에선 정부가 금융 분야 규제 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비금융업계와 금융권, 금융당국도 빅블러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