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내놓은 감세책이 영국 금융시장이 쌓아올렸던 신뢰도에 균열을 내고 있다. 영국 국채 금리가 일일 기준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하락했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긴축 신호를 보냈던 영국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으로 시장에 돈을 풀기로 하는 ‘엇박’ 정책을 내놓으면서 영국의 금융정책에 대한 시장의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28일(현지시간) 영국중앙은행(BOE)은 “이날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영국 국채를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13거래일에 걸쳐 매일 50억파운드씩 650억파운드(약 101조원) 규모로 20년 이상 만기가 남아있는 장기 국채를 사들이기로 했다. 다음 주로 잡아놨던 국채 매각 일정은 다음 달 31일로 연기했다. BOE는 “세계 금융 자산의 가격 조정이 계속돼 장기 국채가 영향을 받으면 영국의 금융 안전성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며 “물가상승률을 목표치인 2% 되돌리기 위해 금리를 변경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영국 국채 30년물 금리 추이. 자료=인베스팅닷컴
영국 국채 30년물 금리 추이. 자료=인베스팅닷컴
BOE의 국채 매입 발표에 영국 국채 금리는 ‘금융 선진국’이라는 위상이 무색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영국의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달 1일만해도 2.3% 수준(연간 기준)으로 안정적이였다. 하지만 지난 23일 트러스 총리가 450억파운드(약 69조원) 규모 감세책을 내놓자 이 금리는 4%를 돌파했다. 감세책과 에너지 비용 지원책으로 불어날 재정적자를 우려한 시장에서 국채 투매세가 이어진 탓이었다. 28일엔 한때 이 금리가 5.1%를 돌파했다. 다급해진 BOE가 시장 개입을 선언하자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포인트 이상 하락해 3.8%대까지 떨어졌다. 일일 기준으로 역대 최대 하락폭을 기록했다.

BOE가 국채 매입에 나선 데는 연기금이 지급 불능 위기에 직면한 게 결정적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지난 23일 감세책 발표 이후 영국 연기금은 최소 10억파운드 규모의 마진콜을 받았다. 마진콜은 선물 거래 계약 당시보다 증거금 가치가 떨어지면 이를 상쇄할 만한 담보를 확보하라는 요구다. 연기금이 담보 마련을 위해 채권을 팔아치우기 시작하면서 국채 금리가 오르자 BOE도 시장 개입을 피할 수 없었다.

금리 인상에 부담을 느낀 영국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서비스를 중단한 점도 BOE를 압박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내 주택담보대출 상품 3596개중 935개가 27~28일 이틀 만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파운드화 가치는 이날 미국 외환시장에서 전일 대비 1.56% 오른 1.0906달러를 기록했다. 감세책 발표 이후 1.03달러까지 떨어졌던 때보다는 높아졌지만 연초 대비 19% 떨어졌다.


시장은 영국의 금융 정책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중앙은행이 긴축을 하려는 상황에서 정부가 감세책을 밀어붙이면서 시장 혼란이 가중됐다는 얘기다. 앨런 몽크스 JP모간 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은 재정에 지속 가능성을 부여할 것이란 트러스 행정부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2016년 브렉시트로 시작된 시장의 의심이 최근 절정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트러스 총리의 문제는 감세를 핵심 정책으로 잡았다는 것”이라며 “트러스 총리가 감세 기조를 너무 빠르게 바꾸면 지지층의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행정부도 감세와 지출을 병행하려는 영국의 정책에 반발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영국의 새 경제 프로그램으로 촉발된 혼란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다”며 “미 재무부가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트러스 행정부에 압박을 가하려 하고 있다”고 28일 보도했다. 지나 레이몬드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날 “감세와 동시에 지출을 늘리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우거나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것 모두에 좋은 대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