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아편으로 만든 진통제…독과 약은 한끗차
전쟁과 질병 그리고 약. 이 세 가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아귀가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모르핀은 진통제로 쓰이던 약이었다. 하지만 모르핀의 원료인 아편은 1840년 아편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됐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뒤 아편 수입이 막히자 독일은 페치딘이라는 약물을 개발했다. 페치딘은 지금도 진통제로 널리 쓰이고 있다. 페치딘을 기반으로 1960년대 펜타닐이란 약물이 개발됐는데, 2017년 미국에서 펜타닐 중독으로 2만8000여 명이 사망했다.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는 전쟁으로 인해 질병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약을 만든 이야기, 반대로 약이 전쟁과 질병을 부른 역사를 다룬다. 다소 자극적이지만 사람들이 몰랐던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냈다.

천연물과 의약품 합성 등을 연구하는 백승만 경상국립대 약대 교수가 썼다. 그가 매 학기 진행하고 있는 교양 강의 ‘전쟁과 질병, 긴 악연의 역사’는 1분 만에 수강 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많이 복용하면 죽을 수 있는 펜타닐은 공격용 무기로 쓰이기도 했다. 2002년 40여 명의 체첸 반군이 독립을 요구하며 러시아 모스크바 오페라 극장에서 700여 명의 관람객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러시아 측은 수면 가스를 살포하며 인질극을 진압했지만 14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 수면 가스에 펜타닐 성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스암페타민은 1890년대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필로폰’이라는 피로 해소제로 널리 쓰였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가미카제 특공대는 ‘자살 비행’에 나서기 전 일왕이 준 필로폰 차를 마셨다.

펜타닐 테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온다. 지난 6월 미국 테네시주의 한 여성이 길거리에 떨어진 1달러를 주운 뒤 온몸이 마비됐는데, 지폐에선 치사량의 펜타닐이 검출됐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였다.

저자는 강조한다. “우리는 전쟁과 테러, 질병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한 번도 그랬던 적은 없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쟁과 테러, 질병에 항상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