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보 예르비 지휘 에스토니안페스티벌오케스트라 내한공연…넘치는 생명력
신뢰와 열정, 에스토니아 음향으로 빚어낸 최고의 차이콥스키
마에스트로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가진 내한공연에서 신뢰와 열정의 연주로 최고의 차이콥스키를 선사했다.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등 낭만 시대의 대곡이 이날 공연의 중심 작품이었지만, 각각 1부와 2부 첫 곡으로 연주된 에스토니아 작품들의 인상도 대곡 못지않았다.

1부의 시작은 경건한 느낌의 타종으로 열리는 아르보 패르트의 '벤자민 브리튼을 기리는 성가'였다.

저음부터 극고음의 하모닉스(미분음)까지 전음역대를 가득 채우는 풍성한 현악이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는 경건한 성가풍이지만, 공간을 가득 메우는 음향 내부에는 무수한 갈라짐과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어 굳건한 경건함과 격앙된 애도의 염이 동시에 흐른다.

이 첫 곡부터 예르비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은 시종 활달하고 리드미컬한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협연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 투린 루벨과 첼리스트 마르셀 요하네스 키츠가 나섰는데 이들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다.

그래서인지 이날 공연은 독주자의 카리스마보다는 관현악적 통일성이 더 부각된 해석이었다.

덕분에 작품은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교향악적인 관현악과 섬세하고 기교적인 실내악이 교차되는 느낌을 줬다.

두 사람의 독주자는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나 서로 간의 호흡에 있어서 탁월했다.

장대한 1악장에서는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가 주도한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은 반면, 서정적이고 세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2악장에서는 두 솔로 악기와 다른 오케스트라의 악기들 간의 아기자기한 조합의 묘가 생생하게 전달됐다.

유머와 민속풍의 생명력이 넘치는 3악장에서는 이 오케스트라가 가진 독특한 매력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악상을 전환시킬 줄 아는 유연성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민함이었다.

전적인 신뢰로 지휘자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음악과 모습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익살스러운 악상에서 서정적이고 고백적인 악상으로 전환이 훌륭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단순히 매끄러웠다는 정도가 아니라, 가벼운 움직임은 생기 있고 무게를 싣는 부분은 진중해 악상의 굴곡을 더없이 선명하게 드러냈다.

매우 높은 수준의 음악이었다.

2부는 에르키 스벤 튀르의 '십자가의 그늘에서'로 시작됐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작곡가 제수알도의 마드리갈을 바탕으로 작곡됐는데, 이 또한 경건함 속에 숨겨진 열정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현악의 각 성부는 다채롭게 엮이고 모이기를 반복하며 점점 종교적 열광으로 고조되는 이 작품에서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밀도 있고 강인한 동시에 열정과 유려함을 잃지 않는 탁월한 연주를 들려줬다.

신뢰와 열정, 에스토니아 음향으로 빚어낸 최고의 차이콥스키
우리에게는 발트해의 나라 에스토니아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 작은 나라는 러시아와 북유럽, 중부유럽의 다양성을 독자적으로 융합해낸 독특한 음향 문화를 지니고 있다.

지휘자와 악단은 2부의 메인 프로그램 차이콥스키 또한 그들만의 개성이 넘치는 최상의 연주로 장식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어두운 데서 출발해 승리로 나아가는 전통적인 교향곡 상에 부합하는 작품이지만, 독일 교향곡처럼 단단한 형식과 구조보다는 다채로운 감성과 자유분방한 에너지, 극적인 강렬함과 민요적인 천진함, 낭만적 서정성 등으로 말하는 천재적인 작품이다.

파보 예르비의 해석은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는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1악장에서는 음울한 단조의 첫 주제와 행진하는 듯한 주제의 템포가 서로 상당히 다르게 설정됐는데, 예르비는 이 두 템포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곡의 세부를 조형했다.

악단은 말 그대로 동물처럼 반응했다.

현악과 금관, 목관 사이의 밸런스는 물론, 가속되고 늦춰지는 호흡의 변화도 완벽하게 통제되었는데, 그럼에도 작위적인 느낌 없이 매끄러웠다.

아름다운 선율로 유명한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에서는 '고조의 미학'이 잘 드러났다.

여유롭게 출발해 급박하게 달아오르는 과정이 반복되는 중에 호른, 오보에 등 솔로 악기들의 노래가 빛을 발했다.

마에스트로 예르비가 큰 흐름과 세부를 동시에 지배하고 있음은 3악장의 변화무쌍한 리듬, 차근차근 긴장감을 쌓아 올리는 4악장의 진행 과정에서도 잘 드러났다.

특히 4악장에서 현악기군은 지휘자의 신호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금관 또한 집중력을 잃는 순간이 거의 없었다.

관객들은 오랜만에 특별한 연극적 과장 없이, 아주 탄력 있고 생명력 넘치는 차이콥스키를 만났다.

시벨리우스와 알벤의 작품이 앙코르로 울려 퍼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지휘자와 악단이 어떤 것인지를 이날 공연은 보여줬다.

이처럼 애정 어린 파트너십을 보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관객들은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뢰와 열정, 에스토니아 음향으로 빚어낸 최고의 차이콥스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