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의 Fin토크] 비트코인은 정말 4년마다 오를까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기록된 최초의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이 시험 삼아 올려본 것이어서 알맹이가 없다. 유튜브의 1호 동영상은 2005년 4월 23일 자웨드 카림이 등록한 ‘Me at the zoo(동물원의 나)’다. “코끼리 코가 엄청 길다”더니 “할 말이 없다”면서 끝나는 18초 분량의 허무한 영상이다. 트위터는 2006년 3월 21일 잭 도시가 끄적인 ‘just setting up my twttr(방금 내 트위터 설정함)’, 인스타그램은 2010년 7월 17일 케빈 시스트롬이 개 사진과 함께 올린 ‘test(테스트)’라는 글이 시초다.

반면 비트코인이라는 네트워크에 올려진 최초의 메시지는 꽤나 함축적이다. 비트코인의 역사는 2009년 1월 3일 익명의 개발자 사토시 나카모토가 생성한 첫 번째 블록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 블록에 ‘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라는 문구를 새겼다. 은행 추가 구제금융이 임박했음을 보도한 영국 신문 더타임스의 1면(사진) 머리기사 제목인데, 금융위기를 촉발한 이른바 ‘중앙집권적 금융 체제’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됐다. 암호화폐 지지자들은 지금도 그날 더타임스 1면을 상징적인 기록물로 여긴다.

비트코인을 키운 '내러티브'

[임현우의 Fin토크] 비트코인은 정말 4년마다 오를까
행동경제학자 로버트 실러는 비트코인이 뜬 이유로 ‘내러티브’를 꼽았다. 정부와 중앙은행에 반기를 든 저항정신, 모든 것이 연결된 투명한 세계라는 이상적 청사진, 정체불명의 사토시라는 인물이 뿜어내는 신비주의가 하나의 드라마처럼 어우러져 대중을 매료시켰다는 것이다.

출사표부터 의미심장했던 비트코인은 이후 13년 동안 여러 수식어를 더해가며 더욱 풍성한 서사를 만들어 나갔다. 희소성과 불변성을 근거로 ‘디지털 금(金)’이 됐고, 전통자산 수익률과 상관관계가 낮다는 이유로 ‘헤지(위험 회피) 자산’이자 ‘인플레이션 피난처’로 불렸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답지한 비트코인 후원금은 감동적이었고, 엘살바도르가 구상한 ‘비트코인 도시’는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지열(地熱) 발전으로 비트코인을 채굴해 자급자족을 이루며 세금도 걷지 않는 자유지대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마이크로스트래티지의 마이클 세일러 같은 유명 기업인의 비트코인 예찬은 이 신종 자산에 ‘권위’를 더해줬다. 채굴이 환경을 해친다는 비판에는 “화석연료 대신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쓰니 친환경적”이란 논리로 맞받았다.

현실과 다 들어맞진 않아

잘나갈 땐 수긍이 됐던 이 모든 이야기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미국이 41년 만에 최악의 물가상승률을 찍는 동안 비트코인은 제대로 된 인플레 헤지 수단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시장이 커질수록 나스닥지수에 연동해 움직이며 ‘그냥 위험자산’으로 기능했다. 비트코인을 절대 안 판다던 테슬라마저 보유량의 75%를 처분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엘살바도르에선 대통령은 유명해졌지만 국민의 삶이 나아졌다는 징후는 없다. 기초체력이 부족한 경제가 비트코인 하나로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물론 가격 폭락에도 불구하고 암호화폐 업계 내부에서는 기술과 산업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크립토 윈터(암호화폐 산업의 혹한기)’가 다시 와도 4년 전보다 잘 견뎌낼 것 같다. 최근 국내 암호화폐거래소들은 리서치센터를 잇따라 세우고 분석 보고서도 내고 있다. 투자자를 방치해온 과거와 달리 나름의 시각과 정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시작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다만 초반에 “하반기부터 비트코인이 반등할 것” 같은 장밋빛 보고서가 나오는 점은 아쉽다. 주가도 모르는데 코인값을 알 수 있나. 비트코인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이론인 ‘4년 주기설’대로라면 내후년께 초강세장이 돌아온다. 이 내러티브의 진위도 머지않아 확인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