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대한 신뢰와 헌신 증명한 공연으로 4년 동행 마침표
마에스트로 자네티, 베르디 레퀴엠으로 경기필과 아름다운 작별
마에스트로 마시모 자네티가 지난 25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롯데콘서트홀에서 마지막 공연 무대에 올랐다.

2018년 9월부터 경기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그는 4년여의 동행을 통해 이 악단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장기로 알려진 이탈리아 오페라뿐 아니라 슈만의 교향곡 전곡, 말러 교향곡 4번, 차세대 피아니스트들과 함께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등에서도 일관성 있고 탄탄한 연주력을 보여줬다.

코로나19 여파로 많은 공연이 취소됐는데도 경기필은 교향악 축제와 정기연주회 등에서 명징한 텍스처와 선명한 리듬이 인상적인 호연들을 남겼다.

자네티의 마지막 공연은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다.

원래 2020년 프로그램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순연됨에 따라 마지막 무대가 됐다.

소프라노 서현경,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멜리스, 테너 김우경이 독창자로 나섰고, 건강상 이유로 내한하지 못한 베이스 안토니오 디 마테오를 연광철이 대신했다.

고양시립합창단과 위너오페라단도 함께 했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1874년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작가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됐다.

100분에 달하는 이 작품은 통상 교회 전례로 행해지던 진혼 미사의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초연 당시 오케스트라 100여 명과 합창단 120여 명을 필요로 한 것에서 보듯 처음부터 콘서트용이었고 독창자들의 창법, 각 곡 사이의 긴장감, 기악과 성악 파트 사이의 관계 측면에서도 오페라를 연상시켰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이 작품이 지닌 '고백적' 측면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페라는 베르디 자신이 진정을 쏟아놓을 수 있는 장르였고, 극장은 더 많은 민중이 만초니에 대한 추모의 염을 나눌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베르디는 죽음이라는 개인적 사건을 강렬한 관현악법으로 무대 앞으로 불러와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오페라적 방식이다.

그러나 네 명의 독창자와 합창은 죽음을 맞닥뜨리는 개개인의 심정적 반응을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다가올 죽음과 남아 있는 삶을 성찰하도록 만든다.

자네티는 지난 4년간 들려주었던 명징한 리듬과 거침없는 템포로 전체를 조형해나갔다.

크게 볼 때 수미쌍관을 이루는 첫 곡과 마지막 곡, 전곡에 걸쳐 네 차례 반복되며 작품의 기둥 역할을 하는 '진노의 날' 모티브 등은 강렬한 극적 효과를 드러내면서도 전반적으로 잘 통제되어 있었다.

금관악기군은 한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리듬이 선명함을 유지해냈고 타악기 또한 폭발력이 있었다.

마에스트로 자네티, 베르디 레퀴엠으로 경기필과 아름다운 작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종일관 오케스트라가 들려준 유연한 변화였다.

경기필은 전체 관현악이 함께 연주하는 격렬한 부분뿐만 아니라 성악 솔로와 짝을 이루는 선율적인 부분에서도 인상적인 음향을 여러 차례 만들어냈다.

고백적 성격이 강한 '레코다레' 부분의 서정적인 목관 파트, 영성체송 말미에 나오는 여린 현악 파트 등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일순간 바꿔놓는 마법 같은 순간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자네티는 얼핏 단순한 '반주'로 보이는 음형들을 살려내며 성악·합창 파트와 유기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한 마디로 전체적인 큰 그림과 더불어 디테일을 살려내려는 연주였다.

전반적으로 성악 파트는 오케스트라가 들려준 밀도 있는 움직임에 비해서는 보다 많은 자유를 부여받은 듯했다.

소프라노 서현경은 전체적으로 좋은 가창을 들려줬지만, 악절의 시작 부분에서 조금씩 반응이 늦는 듯했다.

음악적으로 까다로운 메조소프라노 파트를 크리스티나 멜리나는 훌륭하게 소화했다.

서정적인 김우경의 테너는 반짝였고, 연광철 또한 탄탄한 가창을 들려줬다.

다만, 독창진은 앙상블 장면 및 무반주 대목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이 대목들은 난도가 상당하지만 각 성부가 좀 더 밀도 있게 엮였더라면 보다 뛰어난 극적 효과가 전달됐을 것이다.

또한 고양시립합창단과 위너오페라단 합창단은 시종일관 뛰어난 집중력으로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다.

다소 흐트러진 부분은 거룩송(상투스) 첫머리에서 빠른 템포에 뒤처지는 느낌을 준 장면 정도였다.

롯데콘서트홀에 모인 관객들은 음악이 끝난 뒤에도 한참을 마에스트로의 손끝을 주시했다.

자네티와 함께 한 마지막 공연의 순간을 이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커튼콜 때 자네티는 지난 4년여간 동고동락한 경기필 단원들 모두와 인사하며 아름다운 석별의 정을 나눴다.

그가 선사한 건 음악이었지만, 관객들은 음악 그 이상을 보았다.

4년여의 헌신, 신뢰의 관계, 서로가 발전해간다는 긍정과 희망의 기운. 자네티가 경기필과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던 동행의 발자취였으리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