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라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해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이든 그대 마음대로.”



* 샤를 보들레르(1821~1867) : 프랑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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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취하라! 몰입하라! 무엇에?
아주 도발적인 시죠? 이 시는 샤를 보들레르가 죽고 난 뒤에 나온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에 실려 있습니다. 주된 메시지는 도취와 몰입을 통해 시간의 압박과 권태를 잊으라는 것이지요. 무언가에 집중할 때 우리 삶이 완성된다는 평소 철학을 담은 시이기도 합니다.

센 강변로 17번지에 살았던 보들레르

몇 년 전, 보들레르가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지요. 센 강 한가운데에 형제처럼 떠 있는 섬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큰 게 노트르담 대성당을 품고 있는 시테섬이고, 작은 게 고급 주택가로 이름난 생루이섬입니다. 보들레르는 생루이섬의 동쪽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도는 강변도로(Quai d’Anjou) 17번지에 살았습니다.

‘악의 꽃’을 썼던 방은 4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었지요. 좁은 2차선 도로 곁으로 센 강이 흐르고 밤에는 강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시인의 방 앞으로 버드나무 가로수 잎들이 한가롭게 흔들리다가 가끔 창문 안쪽을 기웃거리곤 했죠. 강을 따라 줄지어 선 이 나무들은 도시의 소음을 은밀하게 막아주기도 하지만, 시인과 함께 고요한 명상의 시간을 보낸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건물 바깥에는 이 집에서 보들레르가 살았노라 하는 특별한 표시가 없었어요. 2층 발코니와 빗물받이 홈통에 금박을 입혀 조금 색다르게 꾸민 게 그나마 눈길을 끌었다고나 할까요. 시인의 향취를 좇아 댄디 풍으로 부근을 산책하다가 소극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마침 보들레르 작품 ‘파리의 우울’을 공연하는 중이어서 화들짝 반가웠죠.

‘선악의 양극단을 비춘 시인’

보들레르는 흔히 ‘현대예술의 사거리’라고 불립니다. 19세기 중엽까지의 모든 예술 경향이 집약됐다가 그에게서 사방으로 갈래지어 나갔다는 뜻이죠. 19세기 사람이면서 20세기 정신에 더 강렬하게 호소한 시인. 빅토르 위고 방식으로 말하면 ‘예술에 새로운 전율을 가져다준 시인’이 보들레르입니다.

시집 ‘파리의 우울’을 번역한 황현산 교수는 그를 ‘시와 예술의 개념에 거대한 변혁을 불러온 사람’이자 ‘선악의 양극단을 비춘 시인’이라고 평했습니다. 대표 시집 ‘악의 꽃’ 때문에 퇴폐주의 시인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품성과 윤리에 천착한 모럴리스트였으며, 아름다움을 인간적 가치의 상위에 놓고 미적 감수성의 폭을 넓히려고 평생 노력한 시인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허약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움에 대한 상념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불멸성에 이를 수 있는지 온갖 장르를 통해 말하려고 했지요.”

취하라! 무엇이든 그대 마음대로

이 시에서도 그는 불멸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방법이 도취와 몰입이지요. 술과 마약에 자주 취했던 그는 그것들이 우리 정신과 감각을 고양시켜 준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제한된 육체와 제한된 수단을 가지고 영원성의 비밀에 접근함으로써 자기 정신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 수단들이 곧 술과 시 혹은 미덕에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에 나오는 ‘바람, 물결, 별, 새, 시계, 달아나는 모든 것, 울부짖는 모든 것, 흘러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이기도 하지요. 그것들에 ‘지금 몇 시인가를’ 물어보라는 것, 그러면 그들이 대답하리니 끊임없이 그에 취하고 또 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흠뻑 ‘취한’ 사람들이 곧 다음 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이었습니다. 이만하면 보들레르가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이든 그대 마음대로’라고 그토록 외쳤던 보람이 있었겠지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