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 여경 유일 생존자 전백규씨…"서울 수복에 엉엉 울어"
부상병 간호와 폐허 된 시내 교통관리 맡아…"나라 사랑 잊지 않길"
"지금의 우크라처럼 아수라장"…6·25 참전 여경의 '그날들'
"선배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질문을 던져요.

"
꼿꼿한 걸음으로 나와 기자를 맞이한 6·25 전쟁 참전 유공자 전백규(96) 씨는 고령이 무색하게 위트가 넘쳤다.

제74회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경기도 광명시 자택에서 만난 전씨는 한국전쟁 참전 여경 유일의 생존자이자 대한민국여경재향경우회 창립 멤버다.

전씨는 1949년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에 있던 서울여자경찰서에 배치받아 순경의 첫걸음을 뗐다.

미아 및 실종자 수색 업무를 담당하던 전씨의 삶은 1년 뒤 전쟁으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전씨는 인천 바다에 놀러 가려고 동료 여경들과 서울역에 모였다.

전씨는 "그때 서울역에서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

군경은 원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나오는 걸 듣고 곧장 서울여자경찰서로 복귀했다"며 긴박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전씨와 동료들은 26일까지 경찰서에서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며 비상 대기하다 27일 전쟁에서 다친 경찰들을 간호하기 위해 경기 의정부시로 급파됐다.

전씨는 "부상자가 셀 수 없이 많고 곳곳에서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며 "주민들은 보따리를 싸 들고 피난 간다고 난리고…지금의 우크라이나처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기억했다.

서울여자경찰서는 28일 해산됐다.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파된 날이다.

해산 때 전씨가 들은 마지막 지시는 "어떻게든 살아서 다시 모이자"였다.

전씨는 마지막 인민군 전차 부대가 들어오는 걸 보고 30일에 피난을 시작했다.

무남독녀인 그는 피난 직전 성북구 돈암동의 부모님 집을 찾았다.

아버지는 "잘 피해서 다녀오라"며 전씨에게 10원짜리 동전 한 뭉치를 건넸다.

전씨는 이 돈으로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 한강을 건넌 뒤 당산동에서 내려 그곳의 국군에게 함락 소식을 알렸다.

수원의 경찰 본부를 향해 무작정 걷던 전씨는 우연한 계기로 도움을 얻는다.

서울로 향하던 경찰 보급 차량이 전씨 앞에서 펑크가 나 멈춰 선 것이다.

전씨는 경찰들에게 함락 소식을 알리고 동승한 뒤 차를 돌려 수원에 도착했다.

이후 대구로 내려가 서울여자경찰서 동료 10여 명과 눈물의 재회를 한다.

7월 16일 대구가 임시 수도가 되고 치안본부가 옮겨온 뒤부터 서울여자경찰서 직원들은 '원호(援護)계'에 소속돼 부산의 경찰병원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전씨는 병원의 열악한 환경과 부상자들의 참상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땐 페니실린이 만병통치약인데, 얻으려면 미군 부대에 가야 했어요.

영어도 못 하는데 제가 가서 주워들은 단어 부스러기들로 '폴리스 호스피털 해브 노 페니실린, 플리즈 기브 미 오케이?'라고 말해서 겨우 구해왔어요.

그걸 구해오면, 수류탄에 팔다리가 잘린 경찰들이 거적때기 위에 누워있는데도 얼마나 좋아하던지…."
"지금의 우크라처럼 아수라장"…6·25 참전 여경의 '그날들'
그해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전씨는 서울여자경찰서 동료 4명과 함께 경찰 선발대가 돼 당일에 서울 땅을 밟았다.

전씨는 "텅 빈 도시에 전차 전선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고, 납북돼 사라진 사람도 많았다"고 말했다.

다행히 전씨의 부모님은 무사했다.

전씨는 서울여자경찰서 교통과에 소속돼 무법지대가 된 을지로 입구 일대의 교통정리를 책임졌다.

그는 "당시엔 신호등도 없고, 내 손의 수신호가 곧 신호등"이었다며 "신호를 안 지키고 군용차를 마구 모는 군인들을 끝까지 따라가 혼쭐을 내줬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당시에는 PX(군 마트)여서 미군들에게 길 안내를 자주 했는데, 내가 1시간 입초를 서면 다녀온 미군들이 고맙다고 놓고 가는 선물이 한 아름 쌓이곤 했다"고 기억했다.

전씨는 이듬해 1·4 후퇴 때 대구로 내려가 그곳에 세워진 경찰병원에서 일한 뒤 그해 3월 서울이 수복됐을 때 다시 상경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울여자경찰서 교통과와 수사과에서 일했다.

젊은 세대가 6·25 전쟁을 잘 모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세대마다 생각이 좀 달라도, 나라 사랑만은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답했다.

전씨는 9·28 서울 수복 뒤 대한민국 중앙청에서 인공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걸리는 것을 보고 엉엉 울었다면서 "태극기가 소중하다는 걸 그때 느꼈다"며 "국가가 없으면 국기도 없다.

태극기가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고마운 건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유공자인 전씨는 매년 현충일 초청받는 곳이 많아 바빴지만 올해는 거동이 불편해 집에서 보낼 계획이다.

그래도 태극기 게양만은 빼먹지 않겠다고 한다.

기자가 아파트 복도를 빠져나올 때까지 오른손을 오래도록 흔드는 그의 모습에서 폐허가 된 을지로 입구에서 교통을 정리하던 25세 순경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지금의 우크라처럼 아수라장"…6·25 참전 여경의 '그날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