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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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딸이 출간한 논문이 모두 ‘돈만 내면 실을 수 있는’ 약탈적 학술지에 게재됐다는 사실 알려져 논란을 빚고 있다.

한 후보자는 “(딸이 논문을 실은) 학술지는 ‘오픈 액세스 저널’로 누구나 자유롭게 논문과 리포트를 올릴 수 있는” 매체라고 주장했다. 오픈 액세스 저널이 동료 연구자의 검증이나 엄격한 심사를 통해 논문을 게재하는 정식 학술지가 아니고, 고교생의 학교 수업 과제조차도 자유롭게 올릴 수 있는 매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 후보자의 주장과 달리, 정상적인 오픈 액세스 저널은 한 후보자의 딸이 논문을 게재한 약탈적 학술지와는 품질이 완전히 다르다. 학계 연구자들은 "약탈적 학술지는 오픈 액세스 저널의 특징을 악용해 등장한 일종의 ‘짝퉁 학술지’로 학문 생태계를 교란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정확히 오픈 액세스 저널이 무엇인지, 한 후보자의 주장처럼 논문을 "입시에 사용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는 건지 확인해봤다.

○서울대·하버드대도 버거운 논문 구독료...오픈 액세스 운동 시발점

한 후보자의 주장을 검증하려면 오픈 액세스 운동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오픈 액세스(Open Access)’란 누구나 인터넷에서 출판된 연구 결과물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누구에게나 접근이 열려있다는 의미다. 2002년 부다페스트 선언(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BOAI)을 기점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오픈액세스 운동이 시작됐다.

학자들 사이에서 논문을 무료로 공개하자는 운동이 시작된 이유는, 기존 출판 생태계에서 논문을 보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대형 학술 출판사들은 개인 연구자와 대학도서관 등에 논문을 보는 비용으로 아주 높은 구독료를 부과한다. 상업 출판사들이 출판·유통 플랫폼을 독점해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가난한 기관이나 소속이 없는 개인 연구자는 연구에 필요한 학술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이 구독료가 어찌나 비싼지, 하버드대나 서울대 같은 유수 대학마저도 구독료에 부담을 느끼는 실정이다. 2012년 하버드 대학 도서관은 전자저널공급업체 ‘엘스비어’의 부당한 가격에 항의하며 1만여 명의 학자와 함께 엘스비어를 보이콧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예산부족과 구독료 인상을 이유로 2016년 국내 최대 학술데이터베이스인 디비피아(DBPIA)에서 제공하는 학술지 중 일부를 구독 중단하기도 했다. 자료 구독비로 인해 2020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누적적자는 21억원을 넘어섰고, 엘스비어의 자료를 구독하기 위해 지불하는 금액은 중앙도서관 자료구매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다.

이렇게 거대 상업출판사의 횡포에 맞서 탄생한 학술지 형태가 ‘오픈 액세스 저널’이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며, 구독료가 없는 학술지다.

○오픈 액세스 저널에 고교생 과제 싣는다?

한 후보자는 “‘오픈 액세스 저널’은 누구나 자유롭게 논문과 리포트를 올릴 수 있는” 매체라고 주장했다. 원래부터가 정식 연구물을 엄격한 심사 이후 싣는 학술지가 아니라, 고교생의 학교 수업 과제조차도 자유롭게 올릴 수 있는 매체라는 주장이다.

사실이 아니다. 오픈 액세스 저널은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된다는 특징이 있을뿐, 일반 학술지와 똑같이 연구자가 집필한 논문을 게재하는 매체다. 학회의 엄격한 심사, 동료 연구자들의 검증과 그에 따른 수정 절차를 거쳐 게재되는 게 정상이다. 한 후보자의 딸이 논문을 실은 학술지가 그런 절차와 윤리를 지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세계적 학술지로 꼽히는 대한의학회의 ‘JKMS(Journal of Korean Medical Science)’도 오픈 액세스 저널이다. 국내 의학 학술지 중 90% 정도가 JKMS와 같이 오픈 액세스 저널이다.

이런 오픈 액세스 방식을 채택한 출판사는 독자로부터 구독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출판 비용을 마련한다. 주로 저자의 논문 게재료다. JKMS 역시 출판에 필요한 비용 중 75% 가량을 저자에게 받는 논문 게재료로 충당한다.

○한동훈 딸, '돈만 내면 되는' 약탈적 학술지 이용

오픈 액세스 운동은 누구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좋은 취지로 시작됐지만, 이 구조를 악용한 ‘약탈적 학술지’도 등장했다. 이런 학술지들은 일정 수준의 심사료만 내면 검증 없이 아무 논문이나 실어주고 금전적 이익을 챙긴다.

한 후보자의 딸이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도 이런 약탈적 학술지다. 한씨가 논문 세 건을 게재한 ‘ABC Research Alert’라는 방글라데시 학술지, 논문 한 건을 게재한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라는 말레이시아 학술지 모두 약탈적 학술지다.
한 후보자 딸이 논문 게재한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는 약탈적 학술지로 의심된다며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에서 '주의' 등급을 받았다.
한 후보자 딸이 논문 게재한 'Asian Journal of Humanity, Art and Literature'는 약탈적 학술지로 의심된다며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에서 '주의' 등급을 받았다.
두 학술지 모두 미국의 연구 데이터베이스 제공 업체인 카벨이 선별한 약탈적 학술지 목록(Cabell’s Blacklist) 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운영하는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에서도 약탈적 학술지로 의심된다며 ‘주의’ 등급을 받은 학술지들이다. 각각 50달러, 150달러만 내면 동료 평가 등 논문 심사 절차 없이 거의 모든 분야의 논문을 실을 수 있다. 홍보 영상에서는 "게재까지 대기 시간은 '제로'"라고 홍보한다. 그 어떤 심사 과정도 없다는 의미다.

○"입시에 이용 안했으니 문제 안된다?"

한 후보자는 아직 고교생인 딸이 논문 실적을 입시에 이용한 적이 없으니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법적인 관점에서는 처벌이 어렵다. 하지만 연구 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을 지낸 김명환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약탈적 학술지는 학문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연구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지적했다.

약탈적 학술지는 '좋은 연구물'과 '나쁜 연구물'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아무런 검증도 되지 않은 고교생 과제 수준의 결과물이 동료 연구자들의 엄격한 검증과 심사 끝에 출판된 연구물과 동일한 형태로 세상에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학계의 연구자들은 연구물의 수준이나 학술지의 평판을 검증할 수 있으니 약탈적 학술지에 실린 나쁜 연구물을 알아볼 수 있다"며 "하지만 일반인이나 다른 분야 연구자들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약탈적 학술지는 학술지 평가 방식도 파훼한다. 오늘날 좋은 학술지, 좋은 연구물의 기준은 다른 학자들에게 인용이 많이 되는 연구물이다. 그러나 이때 어떤 수준의 연구물에서 이를 인용하는지까지 일일이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인용 횟수가 많을 수록 학술지 평가가 올라가는 식이다. 약탈적 학술지는 자전거래로 약탈적 학술지끼리 서로를 인용하고, 인용횟수를 부풀려 수치상으로 좋은 학술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