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행정당국이 유해만 수습 후 화장하고 입구 폐쇄
"공안정국서 졸속과 파행으로 처리…정식 발굴조사 필요"

28일 오전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오름 인근 야초지.
'제주 4·3 유적지(다랑쉬굴)'이라고 적힌 검은색 철판으로 된 안내판과 '다랑쉬굴'이라고 적힌 나무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정작 집단학살 현장인 다랑쉬굴은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제주4·3 집단학살 참상 알린 '다랑쉬굴' 발견 후 31년째 방치
안내판을 넘어 조금 더 들어갔다.

야트막한 언덕 쪽에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큰 바윗덩어리가 보였다.

바위 밑이 움푹 패 있어 굴 입구일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자세히 보니 안쪽에 입구를 막아 놓은 콘크리트가 보였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모를 곳이지만 간혹 탐방객이 찾아왔다.

그러나 안내판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 쓱 둘러보고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다랑쉬굴에서는 30년 전인 1992년 다랑쉬굴에서는 4·3 당시 학살당한 11명의 민간인 유해가 발견됐다.

제주4·3 집단학살 참상 알린 '다랑쉬굴' 발견 후 31년째 방치
4·3 당시 입산 주민들은 군경 토벌대의 학살 위협을 피해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 지점의 다랑쉬굴로 숨어 들어갔다.

이들은 연장 30m 정도의 좁은 굴속에서 생활하던 중 발각됐고, 결국 토벌대가 굴 입구에 지핀 불의 연기에 질식해 희생됐다.

굴속에서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의 포함된 11명의 유해와 솥, 항아리, 질그릇, 물허벅 등 생활용품이 발견됐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제주4·3의 참상은 다시 한번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정부는 이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희생자들의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리기로 방침을 정했고, 당시 북제주군은 허겁지겁 유해만 수습해서 화장한 뒤 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버렸다.

이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4·3 희생자 추념식에 대한 국가기념일이 지정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다랑쉬굴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있다.

다랑쉬굴이 4·3 당시 양민 집단학살 실상을 생생히 알린 곳임에도 발견 이후 현재까지 정식 발굴조사 한번 하지 않은 채 보전 방안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

현재 제주 곳곳에서 4·3 유해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다랑쉬굴은 유해 발굴 사업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박경훈 제주4·3평화재단 전시자문위원장은 지난 26일 제주4·3어린이체험관에서 열린 특별세미나에서 "실제 현장인 다랑쉬굴은 여전히 토지 소유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30년간 아무런 공적 조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1992년 당시 행정이 급하게 유해를 수습하면서 남은 유해 잔해(작은 뼛조각)들과 생활용품 등의 유물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데 아직 정식 발굴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발견 당시 공안정국의 하부조직인 제주도의 검찰과 경찰, 행정당국이 다랑쉬굴 유해 수습에 관여하면서 도민사회나 유족들의 염원과는 다르게 졸속과 파행으로 일을 처리했다"면서 "이 사건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당시 흑역사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 4·3 진상 규명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랑쉬굴 30주년을 맞는 2022년, 다시 다랑쉬굴 발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현재 유해 발굴은 행방불명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사업"이라며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다랑쉬굴에 대한 발굴 작업 필요성이 높아진다면 새로 예산을 확보하고 관련 기관과 협의해 추진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