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586 용퇴론
2004년 17대 총선 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힘입어 당선돼 ‘탄돌이’로 불린 열린우리당 초선의원 108명은 기세등등했다. 당선자 워크숍에서 선배 의원이 “초선 의원 군기를 잡겠다”고 하자 이들 중 한 명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귀를 물어뜯겠다”고 대들었다. 당 소속 의원 71%를 차지한 이들은 대부분 ‘386(30대, 80년대 학번)’ 운동권 출신으로, 거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108번뇌’라는 말이 회자됐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도 임기 초 비서관 40% 가까이를 386들로 채웠다. 386 참모들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는 바람에 장관과의 약속을 깬 일도 있을 정도로 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기를 추진해 민심 이반을 불렀다. 정권 교체 배경엔 386의 무능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치생명을 이어가 지금 여당 중추세력이 됐다.

지난 20년간 정치판 중심에 선 이들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 민주화 운동을 상징자본처럼 여겨왔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선배 정치인들의 ‘계파·계보 정치’에 편승해 구태가 된 것은 약과다. 조국 사태에서 보듯 위선과 반대파를 적폐로 몰아붙이는 독선은 잘 알려진 대로다. 국민의 열망으로 성취한 민주화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기고 요직을 독차지한 것도 모자라 보상까지 요구했다. 노무현 정부의 ‘무능한 진보’, 문재인 정부의 ‘부도덕한 내로남불 진보’라는 딱지는 386의 ‘신(新)상징’처럼 보인다. 이미 2015년 “86그룹은 아직도 1987년 지나간 잔칫상 앞에 서성이고 있다”는 후배 정치인의 조롱을 받고 용퇴를 요구받았다.

대선이 임박하자 다시 여당에서 586이 된 이들의 용퇴론이 나오고 있다. 송영길 대표의 총선 불출마 선언과 우상호 의원의 동조는 선거가 다급하니 다른 586도 물러나라는 압박이다. 이들도 어느덧 60세 언저리이니 그럴 때도 됐다. 그렇다고 물리적 나이만 따질 일은 아니다. 586도 분화를 거쳐 주사파 대부로 불린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처럼 다른 길을 걷는 이들도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586이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고 정치학적 개념”이라고 한 대로, 여당에서 586 못지않게 폐쇄적 사고에 갇힌 40대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이런 정치인이라면 여·야, 나이와 관계없이 빨리 물러나는 게 맞다. 미적거리다 후배로부터 귀를 물어뜯겠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