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 소급분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놓고 9년간 벌인 법정다툼에서 근로자 측이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은 현대중공업이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 적용 대상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놨다.

○大法 “기업, 경영위기 예견해야”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소송 상고심에서 사측 손을 들어줬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고 승소 취지로 16일 부산고법에 돌려보냈다. 이번 소송은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이 모든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재산정한 법정수당·퇴직금 등과 과거 지급분의 차액을 2012년 회사에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적자 늪' 현대重에 추가임금 주라는 대법…오락가락 '신의칙' 기준
이후 현대중공업 측은 재판 과정에서 신의칙을 내세워 반박했다. 신의칙은 ‘통상임금 소급분을 근로자에게 지급할 경우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된다면 이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대법원은 “현대중공업이 추가 법정수당 지급으로 중대한 경영상 위기가 초래된다거나 기업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경영 악화를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신의칙을 들어 근로자의 법정수당 청구를 배척해선 안 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국내외 경제 상황 변동에 따른 위험과 불이익은 기업이 예견하거나 부담해야 할 범위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현대중공업의 기업 규모에 비춰봤을 때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장기간 이어진 현중 위기

현대중공업의 경영 상황은 유럽의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량 감소, 중국 경쟁사의 급격한 성장 등으로 2014~2015년 무렵부터 장기간 악화하는 추세였다. 여기에 지난해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현대중공업의 2020년 영업이익은 329억원에 머물렀다.

올해는 3분기까지 총 3200억원 수준의 적자를 냈다. 원심(항소심) 재판부가 “원고들이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미지급 법정수당의 추가 지급을 요구하는 것은 노사가 합의한 임금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라며 사측의 신의칙 위반 주장을 받아들인 게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중공업 측은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한번 법리를 다퉈볼 것이라는 방침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따른 충당금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각 계열사 재무제표에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 예측하는 통상임금 소급분 규모는 약 6000억~7000억원으로 실제 규모는 파기환송심 결과가 나온 뒤 확정될 예정이다.

재계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두고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논평을 내고 “오늘날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코로나19 등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변화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며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으로 산업현장에 혼란과 갈등만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호소했다.

학계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한 노동경제학자는 “법원이 법적 판단이 아니라 경영·재무적 판단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경제지표는 항목과 기간 설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통계나 결과가 나오는데, 경제전문가가 아닌 법관이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혼란스러운 재계

재계는 신의칙이 언제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법리가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대법원조차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락가락 판결’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19년 신의칙 적용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던 ‘시영운수 통상임금 사건’에서 사실상 도산 위기가 아니면 신의칙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판결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작년 6월 코로나19 여파로 위기를 맞은 아시아나항공 통상임금 사건에선 신의칙을 적용했다. 이후 한국GM, 쌍용자동차에서 제기된 통상임금 소송에서 각각 “공적자금 8100억원을 지급받았다” “장기간 큰 폭의 적자로 회사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점을 근거로 신의칙을 적용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 이후 판결을 내린 기아·금호타이어 등의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또다시 신의칙을 부정했다. 대법원이 명확한 법리해석을 내놓지 않아 같은 사건을 두고 1, 2심에서 신의칙 적용 여부가 엇갈리는 일도 적지 않다.

법조계서는 대법원이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판결을 통해 ‘신의칙 적용을 앞으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자가 경영 악화 가능성을 매번 정확히 예견하고 극복 가능성을 진단하는 게 현실에서 가능한가”라며 “사실상 신의칙 적용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현아/곽용희/황정환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