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관심을 받는 큰 사건이나 중요한 재판의 경우, 양측 변호인이 파워포인트를 동원해 치열하게 변론을 펼쳤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서 파워포인트 활용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대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는 공개 변론 영상들 속에서 어느 정도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5개 변론 영상을 보면 변호인들은 하나같이 파워포인트를 띄워 놓고 변론을 시작하지만 대부분 글씨만 가득 찬 슬라이드를 낭독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나마 2020년 5월 진행된 ‘가수 조영남 그림 판매 사기 사건 공개 변론’에서 검사 측이 띄운 그림 몇 점만이 최소한의 볼거리를 제공해 줬을 뿐이다.

2000년대 중반에는 위 사례와 같이 글씨만 빼곡히 나열된 파워포인트가 대세였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 애플 회장이 핵심만 간결하게 표현한 슬라이드를 들고나오자 사람들은 내용의 양이 아니라 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심플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슬라이드를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청중이 질려버릴 정도로 글씨만 가득 들어찬 슬라이드가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의장은 일찍이 사내 파워포인트 보고를 금지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 역시 직·간접적으로 파워포인트 무용론을 설파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법정에서는 여전히 ‘파워’가 없는 파워포인트가 난무하고 있다.

변론에 따라 한 개인은 물론 기업의 운명까지 바뀔 수 있는 곳이 바로 법정이다. 내뱉는 말 한마디, 보여지는 증거 자료 한 장이 너무나 중요할 수밖에 없다. “녹은 쇠에서 나온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는 법구경 속 울림처럼 효과적인 변론을 위해 준비한 파워포인트가 정작 변론 자체를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프레젠테이션 전문가 전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