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공호수를 장식하는 연꽃 풍광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오래된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에서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호수인 궁남지도 그래서 멋스러웠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만개한 연꽃이 선사하는 풍광은 여느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움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것은 흔치 않기에 새롭게 느껴진다.

부여 궁남지는 백제 말기인 634년에 궁궐의 남쪽 별궁 주변에 조성한 연못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국내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7∼8월이면 수많은 연꽃이 약 10만 평에 이르는 궁남지와 주변 연지를 수놓는다.

빅토리아 수련, 가시연, 열대수련, 수련, 홍련, 백련 등 대표적인 연꽃 종류만 50여 종이다.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궁남지를 끼고 매력적인 도보여행길 2개가 조성돼 있다.

사비길과 백마강길이다.

거리가 각각 13.4㎞, 24㎞에 이르는, 제법 긴 길들이다.

사비길은 정림사지, 부여나성, 능산리절터, 능산리고분군을 지난다.

백마강길은 백마강을 따라가다가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성으로 이어진다.

사비는 부여의 옛 이름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큰 강'이라는 뜻이다.

금강 중 부여를 지나는 구간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정림사지, 능산리 절터와 고분군 등 유구한 백제 유적을 돌아볼 수 있는 사비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신라 금관과 함께 삼국시대 공예 명작의 쌍벽을 이루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곳이 능산리 절터다.

사비길은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 신동엽생가∼궁남지∼능산리고분군∼부여나성∼금성산∼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지∼부소산성∼구드래조각공원을 거쳐 부여시외버스터미널로 원점 회귀한다.

백제 유적을 보고 싶은 욕심에 우리는 사비길 중 궁남지∼정림사지∼국립부여박물관∼금성산∼부여나성∼능산리고분군 코스를 선택해 걸었다.

7∼8㎞를 걸었나 싶은데 이곳저곳 유적을 들여다보느라 6시간 이상 걸렸다.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금성산을 넘고 능산리산 중턱을 걸었다.

두 산 모두 해발 120m가량으로 높지 않았지만 산 두 개를 오르는 길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물을 넉넉히 준비하고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걸어볼 만한 길임이 틀림없다.

궁남지 연꽃은 아침나절에 어여쁘다.

오후에는 활짝 폈던 꽃봉오리가 오므라들기 때문이다.

진흙탕에서 아름답고 꿋꿋하게 피어나는 연꽃은 감동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끝없이 펼쳐진 연꽃밭을 경험하고 싶다면 여름날 아침 궁남지에 가보는 것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을 듯하다.

우리가 걸었던 길을 사비길이 아니라 궁남지길이라 부르고 싶다.

이 길이 널리 알려져 많은 걷기 애호가들에게 기쁨을 주길 바란다.

실제로 궁남지에는 부여 군민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궁남지에서 연꽃보다 먼저 방문객을 반긴 것은 새물닭이었다.

새물닭, 오리 등 야생동물들은 사람을 피하지도, 겁내지도 않았다.

궁남지에는 연꽃 외에도 부용화, 물양귀비, 부처꽃, 물무궁화 등 평소 보지 못했던 꽃들이 많았다.

꽃송이가 큰 부용화의 붉은 색은 여름 햇살만큼 강렬했다.

궁남지에는 백제의 왕과 왕비가 된 서동 왕자와 선화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온다.

궁남지 한복판에는 작은 인공섬이 있고, 섬에는 포룡정(抱龍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널찍한 정자 마루에서 가족끼리, 연인끼리 둘러앉은 시민들이 더위와 감염병을 피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궁남지에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700∼800m 걸어가면 정림사지가 나온다.

별로 남지 않은 백제 유물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문화재가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견뎠으리라.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불린다.

부처를 상징하는 석탑이 그만큼 많다.

석조는 목조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이다.

정림사지 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정림사지 석탑이 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

균형 잡힌 형태와 비례,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백제미를 대표한다.

좁고 낮은 단층기단, 살짝 들린 옥개석,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은 정림사지 석탑의 특징이다.

정림사지에는 석탑 외에도 고려 시대 만들어진 석불좌상, 정림사지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았으나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정림사지를 나와 부여박물관 옆길을 지나서 부여나성과 능산리고분군으로 가기 위해 금성산을 넘었다.

금성산은 백제의 사비시대(538∼660년) 123년간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을 주던 세 영산 중 하나였다.

백제문화제가 열릴 때면 세 영산에 제사를 지내는 삼산제가 금성산 성화대에서 열린다.

금성산을 넘는 동안 오르막과 내리막이 2번 정도 반복된 듯하다.

숲은 맹렬한 여름빛을 가리는 그늘을 만들어줬다.

금성산을 내려와 큰 도로를 건너 다시 능산리산을 올랐다.

더운 숨이 목에 차오를 때쯤 수려하게 뻗은 부여나성을 만났다.

나성을 따라가면 능산리 절터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길이 6㎞의 나성과 절터는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성곽과 절터의 적막과 단정함이 지나온 길의 괴로움을 한순간에 잊게 했다.

나성은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 방어시설이었다.

백제는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기 위해 538년 전후에 이 성을 지었다.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출현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다.

한반도에서는 최초로 축조된 외곽성이다.

부여와 공주에는 관광객, 고고·역사학자 등 일본인이 많이 방문한다.

일본이 고대에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백제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외국 손님이 찾는 지역일수록 문화재 관리와 보존에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스스로 찾아오는 손님만큼 우리 자신을 잘 알리고 문화 외교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대상은 없을 것이다.

능산리고분군은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고분은 동쪽, 서쪽, 중앙 등 세 군데에 16기가 분포돼 있다.

동쪽과 서쪽의 고분은 귀족의 무덤으로, 중앙의 무덤은 왕릉으로 추정된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은 중앙의 7기다.

일곱 능 중 가장 큰 2호분을 성왕의 능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있다.

성왕은 많은 업적을 남겼던 출중한 인물이다.

능산리에 있었던 절은 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해 지었던 사찰이었을 것이다.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능산리 고분군과 절터 사이에는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의 가묘인 단이 있다.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융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낙양시 북망산에서 융의 묘가 발굴되자 지난 2000년 이곳에 두 사람을 위한 단을 만들고 낙양의 흙을 가져와 단에 넣었다.

그들의 비극적 최후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부소산 백마강변에 있는 낙화암은 백제 멸망 후 이 바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삼천 궁녀의 전설로 유명하다.

이 전설로 의자왕에게는 패자에 더해 방탕 군주의 이미지가 덧칠해졌다.

한국 고어에서 '삼천'은 3천이라는 실제 숫자가 아니라 단지 '많음'을 뜻하는 관용 표현으로 쓰일 때가 많았다.

'적이 천만이 온다 해도 난 두렵지 않소'라고 했을 때 '천만'은 아주 많은 수효를 이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역사에 궁녀 수가 3천 명에 이르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궁녀가 제일 많았을 때는 조선 시대였는데 그때도 최대 600명 정도였다.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임금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걷고 싶은 길]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궁남지길
그러나 어리석은 역사 왜곡에 무감각해서야 지혜로운 민족이 될 수 없다.

백제 멸망의 본질적 이유를 의자왕의 방탕에서 찾아서야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어렵다.

부여에는 오래된 것이 많다.

옛것에서 편안함과 삶의 정취를 발견하는 여행자는 부여를 찾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