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더 기빙 플레지
1980년대 홍콩 영화를 주름잡았던 주윤발은 2018년 전 재산 7억1900만달러(약 8400억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어차피 그 돈은 제가 잠깐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라며 “지금 당장 은행에 그 돈을 맡긴다고 해도 죽고 나면 소용이 없다. 그 돈이 의미 있는 단체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였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조창걸 한샘 회장이 지분을 매각한다. 가족으로의 승계가 아니라 가장 가치가 높은 시기에 51년간 일궈 온 기업을 더 경영을 잘할 수 있는 곳에 넘긴다는 거다. 그리고 자신의 지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공익사업에, 그것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지켜나갈 진정한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교육사업에 투자한다고 한다.

이미 외국에서는 이런 기부 활동이 활발하다. 가속화된 부의 축적이 억만장자로 하여금 복지와 공공재 투자에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문제와 세계적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런 노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가 워런 버핏과 공동으로 2010년에 만든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다. 버핏은 원래 자신이 죽고 난 뒤 자선 기부를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 자신의 사후 기부 계획을 뒤집고 생전부터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더 기빙 플레지는 2013년부터 전 세계 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해 2019년까지 연평균 17명의 신규 서약자가 가입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부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레이 달리오 브리지워터 회장 등 세계 굴지의 부호가 가입해 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배달의민족 창업자인 김봉진 의장이 재산의 절반인 55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히면서 더 기빙 플레지로부터 공식 서약자로 인정받았다.

또 올해 3월에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재산의 절반인 5조원 이상을 기부하기로 하면서 220번째 기부자가 됐다. 그런데 억만장자의 기부 관련 연구에 의하면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이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보다 더 기빙 플레지에 서명할 확률이 높으며 더 많이 기부한다고 한다. 김봉진 의장이나 김범수 의장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과거의 부자들은 은퇴가 다가올 때만 자선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거부들은 젊은 나이에 환경, 교육, 질병퇴치와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부 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중 상당수는 지금의 억만장자가 되기까지 25년, 30년이 걸린 사람들이 아니라 불과 몇 년 만에 부자가 된 사람이다. 억만장자의 사회 환원행위 여부는 바로 심적회계이론(mental accounting theory)으로 설명된다. 돈을 버는 방법이 돈을 쓰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연구한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탈러 교수가 제시한 이론이다. 그는 심적회계란 “경제적 활동을 계획하고, 평가하고,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인지 작업”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은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더라도, 기부는 심리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 이때 심적회계가 심리적 고통의 정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그들의 생각에 ‘자신의 돈’이라고 입력됐다면, 이런 돈을 기부하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돈은 기부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마음에 입력돼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돈과 자신을 심리적으로 분리할 경우 기부의 고통은 누그러질 것이다. 여러 난관을 겪고 모험을 하면서 힘들게 벌어온 자산이자 어렵게 만든 성공을 자신과 분리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래서 더 가치 있고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우리 청년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스타트업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성공해 젊은 슈퍼리치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이 중 자신이 일구어온 자산을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쓰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기부자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국가와 정부에 버거울 수 있는 사업과 정책을 과감히 실행하는 그런 재단들에 의해 사회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는 미래를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