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저녁이 있는 삶!”

손학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12년 제18대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며 썼던 선거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이제 주52시간 근무와 워라벨 문화를 대변하는 문구가 됐다. 정치의 계절이 다시 돌아와 많은 말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다음 날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이 있는 삶!”에 버금가는 선거 슬로건이 아직은 없는 듯하다.

이 슬로건은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온 우리들에게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저녁이 없는 삶과 저녁이 있는 삶을 대비시킨 강한 호소력 때문에 이 슬로건은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이처럼 어떤 대상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포지셔닝(Positioning)이라고 한다.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포지션을 잡아가는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자동차는 사실상 성능의 차이가 없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인식의 차이다.

비슷비슷한 자동차인데도 사람들은 왜 각각 다르게 인식하는 것일까? 예를 들며 이렇다. 베엠베는 질주(Driving)로, 렉서스는 호사(Luxury)로, 메르세데스 벤츠는 품격(Prestige)으로, 사이언은 젊음(Youth)으로, 도요타는 신뢰(Reliability)로, 볼보는 안전(Safety)으로 인식한다.

자동차 광고에서 여러 단어를 쓰지 않고 오랫동안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소비자의 머릿속에 그렇게 포지셔닝했기 때문이다. 즉, 제품력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도록 했다.
여러 자동차 브랜드의 포지셔닝
여러 자동차 브랜드의 포지셔닝
포지셔닝이란 개념은 마케팅 전문가인 잭 트라우트(Jack Trout)와 알 리스(Al Ries)가 처음으로 제시했다.

청량음료 세븐업(7Up)의 ‘콜라 아님(The Uncola)’ 캠페인의 서막을 열었던 ‘봉지’ 편(1968)을 보자.

봉지에 담겨있는 두 개의 음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봉지를 벗겨낸 병 하나는 7Up이다. 병에는 ‘콜라 아님’이라는 표시가 붙어있고 이런 헤드라인을 크게 강조했다.

“언콜라 같은 콜라는 없습니다 (There’s no cola like The Uncola).”

콜라가 아니라니? 소비자들은 당황하면서도 호기심을 느꼈으리라. 콜라의 대안으로 판매하겠다는 전략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7Up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코카콜라에 현저하게 밀린 상태에서, 7Up이 상쾌하고, 신선하고, 갈증을 해소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한들 어떠한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비유하자면 갑판의 의자를 재배치할 때가 아니라 침몰하는 배를 어떻게든 구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이었다.

어떠한 마케팅 수단도 작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차별화된 광고 메시지만 필요했을 뿐이었다.

광고 의뢰를 받은 광고회사 J. 월터 톰슨(JWT) 시카고 지사에서는 먼저 7Up의 맛 테스트를 실시했다. 분석 결과, 소비자들이 7Up을 콜라 대신 마시는 상쾌한 음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발견됐다.

여기에서 통찰력을 얻는 광고 창작자들은 고심 끝에 경영진에게 ‘콜라 아님(The Uncola)’이라는 두 단어를 제시했다.

콜라가 아닌 다른 음료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더욱이 언콜라(Uncola)는 이상하게 들리는 비문법적 표현이었다.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최고경영자는 광고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7Up을 콜라를 대신할 음료로 팔기로 결정했다.

결국 7Up은 청량음료 시장에서 엄청난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의 청량음료 시장에서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에 이어 시장점유율 3위의 브랜드로 급부상했다.
7Up의 론칭 광고 ‘봉지’ 편 (1968)
7Up의 론칭 광고 ‘봉지’ 편 (1968)
콜라의 대안으로 판매하겠다는 7Up의 전략은 세 가지 맥락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먼저, 청량음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여론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했다.

다음으로, 여러 청량음료 브랜드를 콜라의 범주로 묶어버리며 경쟁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재배치했다.

마지막으로, 콜라가 아니라는 포지셔닝 메시지를 청량음료를 가장 많이 마시는 젊은이들의 저항(Un-) 문화에 연결해 동시대의 집단의식에 접근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10년 동안 계속된 이 캠페인은 현대 광고사에서 포지셔닝 개념을 본격적으로 적용한 대표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세븐업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포지셔닝(Positioning)이다. 포지셔닝이란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대상을 자리매김하게 하는 전략이다.

7Up은 소비자들이 콜라와 유사한 음료로 인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콜라가 아니라고 강조해 차별화에 성공했다.

포지셔닝 전략에 의하면 마케팅이란 제품력의 싸움이 아니라, 인식의 싸움이다. 실제와 관계없이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머릿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인식의 싸움이다.

“자리매김을 원한다면 어떤 입장을 취하라(If you want a positioning take a position).”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적이 없는 사람은 친구도 없다며, 역사의 변증법을 설명했던 헤겔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어쩌나 싶어, 입장을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치 후보자에 대한 지지 선언을 유보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면 좋겠지만 지지하지 않은 후보가 당선되면 낭패다.

그래서 낮에는 이 캠프에서 밤에는 저 캠프에서 뛰며 눈치 30단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순수한 의도든 후일을 기약하는 차원에서든, 세태가 이러할진대 어떤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면 포지셔닝 개념을 몸소 실천하는 분들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면 자리매김이 분명해지지만 그만큼 외로운 법. 가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그렇다. 포지셔닝이란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일이다. 다른 것들 다 버리고 하나에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울 수밖에 없다.

경영에서도 정치에서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브랜드 메시지나 정치 슬로건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 전에 “저녁이 있는 삶!”이 있었다면, 이제 “희망이 있는 아침!”이란 슬로건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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