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 유가가 치솟고 있지만 미국 셰일업체 등이 증산에 나서지 못하는 배경에는 잘못된 ‘헤지(위험 분산) 계약’이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올해 유가를 배럴당 55달러 선으로 예상하고 계약을 맺었는데, 최근 유가가 75달러 안팎으로 오르자 오히려 손실이 나고 있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일 컨설팅업체 IHS마킷을 인용해 올 들어 미국 대형 석유업체들이 원유 가격 폭등에 큰 손실을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6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은 장중 배럴당 76.98달러까지 뛰었다. 2014년 11월 이후 최고치다. 이 같은 국제 유가 급등에도 미국 셰일업체들은 웃지 못하고 있다. IHS마킷은 헤지 계약 탓에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 1100만 배럴의 3분의 1가량은 55달러에 팔리고 있다고 전했다.

IHS마킷은 올 상반기 미국 석유기업의 헤지 손실이 75억달러(약 8조6000억원)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유가가 연말까지 배럴당 75달러를 유지한다면 손실은 120억달러로 불어날 전망이다. FT는 “유가 상승에도 과거처럼 미국 셰일업체들이 증산 경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점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위안을 주고 있다”고 했다. OPEC이 미국의 공급 물량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국제 유가 상승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국제 유가 급등에도 생산량을 확대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섣부른 투자 대신 판매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증산 경쟁으로 인한 수익률 하락을 막기 위해 생산량 확대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미 셰일업체 데번에너지의 릭 먼크리프 최고경영자(CEO)는 “생산량을 두 자릿수 비율로 늘려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너무 오랫동안 업계에 과잉 투자가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데번에너지는 올해 생산량은 그대로 유지하고 내년에는 최대 5%가량만 늘릴 계획이다.

FT는 “미국에서도 점점 고품질 셰일층을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업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며 “엑슨모빌과 같은 석유 메이저 업체도 주주들로부터 투자를 줄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