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재정 손실을 초래한 교황청의 영국 고급 부동산 매매 의혹과 관련해 안젤로 베추 추기경(73)을 비롯한 개인 6명과 기업 4곳이 재판에 넘겨졌다.

교황청은 3일(현지시간) 이번 의혹에 연루된 이들의 명단과 혐의 내용을 공개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교황청 관료 조직의 정점에 있는 국무원은 2014년 이탈리아 사업가가 운영하는 펀드에 2억유로(약 2700억원)를 투자해 영국 런던 첼시 지역 고급 부동산 지분 45% 등을 획득했다. 투자 밑천은 전 세계 신자의 헌금으로 조성된 '베드로 성금'이었다.

국무원은 초기 투자에 1800만 유로(약 242억원) 상당의 투자 손실이 발생하자 2018년 말 해당 부동산을 아예 사들이기로 했고 전체 투자액은 3억5000만유로(약 4700억원)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른 손실 규모는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으나 교황청 재정을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손실액이 수억 유로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교황청 사법당국은 해당 투자 건에 대한 내부 감사를 진행한 교황청 감사원의 고발로 2019년 7월 정식 수사에 착수했는데, 2년 만에 그 결과가 나온 것이다.

기소된 이들 중에는 부동산 투자를 중개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을 속이고 사익을 취한 혐의를 받는 브로커와 거래 과정의 부적절성을 인지하고도 이를 방조했다는 의심을 사는 교황청 전 재무정보국(AIF) 고위 관계자, 해당 투자 활동의 실무를 담당한 국무원 관계자 등이 포함됐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베추 추기경이다.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로도 거론돼온 그는 금융 비리로 재판에 넘겨진 최고위 성직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그에게는 횡령, 직권남용, 위증 교사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문제가 된 투자 활동은 그가 국무원에서도 가장 권한이 막강한 국무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일어난 일이다.

베추 추기경은 교황청의 금융·재무 활동을 총괄하는 국무장관으로서 부동산 소유권 취득 결정 등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사법당국 수사 과정에서 다른 관련자가 허위 진술을 하게 하는 등 수사를 방해한 혐의도 있다.

부동산 의혹 외에 자신의 친동생이 운영하는 자선단체에 국무원 기금 22만5000유로(약 3억원)와 이탈리아 주교회의 기금 60만유로(약 8억원) 등 총 82만5000유로를 기부하도록 하고, 교황청을 위한 비선 외교 활동 명목으로 2018∼2019년 이탈리아 40대 여성에게 국무원 기금 57만5000유로(약 7억7000만원)를 전달한 것 역시 횡령 또는 직권 남용 혐의 사실에 포함됐다.

이번에 사법당국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장 전체 487쪽 가운데 75쪽이 베추 추기경의 혐의와 관련된 것이라고 로이터는 전했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9월 베추 추기경이 교회 기금으로 친동생 자선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사실을 보고받고 그를 시성성(순교·증거자의 시복·시성을 담당하는 교황청 부처) 장관직에서 전격 경질했다.

다만 베추 추기경은 이번 기소에 대해 "교묘한 술책"이라며 결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베추 추기경을 비롯해 기소된 이들에 대한 첫 공판은 이달 27일로 잡혔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번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와 기소된 이들의 면면, 혐의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보고받고 재판 진행을 최종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이번 영국 부동산 비리를 계기로 교황청 금융·재무 구조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작년 12월에는 국무원의 교회 기금 관리 기능을 박탈하는 행정 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