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앞에서 생긴 일
에펠탑은 1889년에 세워졌다. 높이가 무려 984피트이니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300미터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높이여서 이 에펠탑을 보기 위해 인근 유럽국가의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펠탑이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철탑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Alexandre Gustave Eiffel 이라는 교량기술자의 설계로 지어진 이 탑은 그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이라고 명명되었다. 1931년 미국 뉴욕에 Empire State Building 이 완공되기 전까지 42년간을 세계 최고 높이의 건축물로 존재했다. 1937년 서울 종로에 6층짜리 화신백화점이 세워졌을 때, 그 높이에 놀랐었던 한국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에펠탑이 세계인에게 던진 높이의 충격은 바벨탑의 도전과 비견될 듯 싶다. 물론 화신 백화점은 이미 없어졌고 그 당시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다는 기억 속의 유물로만 남아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유명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에펠탑 앞에서 난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경험도 아니었다. 나의 생각의 틀을 한층 넓혀준 에피소드였으니 말이다.
한일 월드컵 4강의 환희가 채가시지 않은 2002년, 그것도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12월 중순에 난 파리에 있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층 달아오른 파리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난 에펠탑에 오르기로 마음 먹고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Chaillot 궁전과 가장 가까운 Trocadero 역에서 내렸다. 역 밖으로 나오자 마자 펼쳐지는 에펠탑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파리에 올 때마다 매번 보는 에펠탑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직전에 보는 에펠탑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난 에펠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의 뒤편에서 들리는 모터사이클의 순간 가속에 의한 굉음과 비명소리.
“ 아악, 아악 ”
뒤돌아 보니 두 명의 동양여자가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서있었고 모터사이클은 이미 백여 미터 앞에서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시점이었다. 말로만 듣던 속칭 ‘오토바이 날치기’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두 명의 여자가 계속 아무 말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데 그 장소에 있었던 그 누구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갈 길을 가는 모습에 이 곳이 파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바른 생활 교과서를 배우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지 더더욱 그랬다.
난 용기를 내어 그 여자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괜찮은가요?,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
그제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하는 두 명의 여자.
“ 우린 일본에서 온 관광객입니다 ”
두 명의 일본여자와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으며 언제까지 파리에 묵는 지 등을 물으며 난 대화를 이끌어 갔고 주변에 경찰이 있나를 찾았다.물론 경찰은 없었다. 필요할 때 없는 경찰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똑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둘과 난 샹제리제 거리까지 걸어 가서 경찰을 찾기로 했다. 에펠탑을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걸어가면서도 연신 세느 강을 쳐다보는 그들에게 난 물었다.
“ 강은 왜 그렇게 자주 쳐다보는 건가요.”
그들은 대답했다.
“ 가방 속의 내용물을 다 꺼내 갖고 가방은 강물로 버렸을까 봐요,
가방이라도 찾고 싶어서요 ”
너무 태연한 대답에 순간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그것은 짧지만 의미 있는 대답이었다. 그들은 이미 파리에 오기 전에 악명 높은 파리의 소매치기에 대한 정보를 듣고 온 것이었다. 그래서 가방 속에는 여권을 넣지 않았고 돈도 분산해서 넣었다는 말도 했다. 이 얼마나 에펠탑의 낭만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대화내용이란 말인가. 얼마나 많은 가방이 소매치기 되어 내용물이 꺼내진 후, 세느 강의 물 위를 떠내려가기에 이런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약 2킬로 되는 거리를 걸어서 샹제리제 거리에 왔고 간신히 개선문 근처에서 경찰 한 명을 찾았다. 에펠탑 앞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reporting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는 듯한 경찰의 표정에 다시 한 번 실망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동정 어린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저 무뚝뚝한 경찰의 표정에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일본 여자들로부터 계속되는 고맙다라는 말을 뒤로한 채 난 호텔로 되돌아 왔다. 밤새 내가 겪은 일이 생각나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무사히 파리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와 그 때 있었던 일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지인들의 모임에서 난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사셨던 교수님 한 분을 만날 수 있었고 나의 이런 경험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나의 약간은 분노에 찬 이야기를 듣고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
“ 브라이언군, 프랑스에서는 모두가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네, 소매치기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지나가는 행인도 자신이 가는 곳으로 최선을 다해 발 길을 옮긴다네, 경찰도 자신의 의무를 다할 뿐, 얄팍한 동정심 따위는 없지, 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최선을 다할 뿐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네, 유교문화에서 자란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좀 냉정히 보이지만 우리의 관점으로 그것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나. 적어도 그런 소매치기가 빈번해도 파리는 예술의 도시임에 틀림이 없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파리에서 생활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하네, 무엇인가를 버리는 역할과 줍는 역할이 있을 때 우리가 버리는 역할을 나쁘다고만 한다면 줍는 역할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지 않은 가 ”
난 교수님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에펠탑 앞에서 생긴 일이 나에게 준 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다양한가라는 것에 대한 질문과 하나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는 거였다. 다양성, 쉬운 말이지만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난 파리에 다시 갈 기회가 있었고, 에펠탑에 올랐고, 전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관점으로 파리를 다시 보았다. 물론 모터사이클 굉음 같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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