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에서 이른바 ‘백지수표 회사’라 불리는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열풍이 뜨겁다. 증시가 활황일 때 얼른 증시에 상장하려는 기업의 희망과 초저금리를 바탕으로 무섭게 주가가 오르는 혁신 기업에 올라타려는 투자자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한국 증시에서도 스팩 상장이 활발해지고 있다. 다만 한국에 상장하는 스팩은 덩치가 작은 데다, 비상장사 합병 시 거래소 심사를 받아야 해 열기가 뜨거운 편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21일 스팩인사이더에 따르면 올 들어 미국 증시에 상장한 스팩은 모두 271개, 총 공모금액은 883억달러(약 100조원)에 달한다. 사상 최대였던 작년에는 248개 스팩이 상장해 833억달러를 모집했다. 한 분기 만에 지난해 전체 기록을 넘어섰다.

스팩은 껍데기 회사를 증시에 상장시켜 먼저 자금을 조달한 뒤 비상장사를 인수·합병(M&A) 한다. 이때 스팩은 소멸하고 피인수회사가 상장회사로 존속하는 ‘역합병(reverse merger)’가 이뤄진다. 일반 기업공개(IPO)는 기업 실사 등을 거쳐 상장 준비에 1~2년이 걸리지만, 스팩은 5개월 안에 상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경 CFO Insight] 미국 증시에 부는 SPAC 열풍
미국에서 스팩은 상장 후 24개월 내 M&A를 해야 하며, 한국에선 보통 36개월이다. 기한 내 M&A에 실패하면 투자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둘려준다. 위는 열려있고, 아래는 닫힌 구조다 보니 투자자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2016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스팩에 대한 시선은 냉랭했다. 재무 구조가 나쁘거나 이익이 나지 않아 IPO를 할 수 없는 기업들이 우회 상장하는 통로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2017년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상장 요건을 완화하며 점차 스팩 상장이 늘어나다 지난해 코로나19를 계기로 스팩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스팩인사이더에 따르면 미국 증시에서 2017년 34개였던 스팩 상장 건수는 2018년 46개, 2019년 59개에서 2020년 248개로 껑충 뛰었다. 총 공모액도 2017년 100억달러, 2018년 108억달러, 2019년 136억달러에서 2020년 833억달러로 급증했다. 박범지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 이후 풍부한 유동성, 차세대 기술 산업 부각, 개인 투자자 참여로 인해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며 “스팩은 이런 기업들을 재빨리 증시에 상장시킬 수 있어 매력적인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스팩 합병 후 주가가 치솟는 성공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4월 스팩 합병으로 나스닥에 상장한 온라인 스포츠 베팅게임 업체 드래프트킹스(DKNG)는 이후 주가가 약 250% 올랐다. 희토류 업체인 MP머티리얼스(MP)는 작년 11월 스팩 합병으로 상장해 넉 달 만에 241.8% 상승했다. 니콜라처럼 사기 의혹이 불거져 주가가 급락한 사례도 있지만 스팩 투자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스팩 상장이 활발해지고 있다. 올해 국내 증시에 상장한 스팩은 6개다. 예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빠른 페이스다. 작년엔 3월 중순까지 4개, 2019년엔 1개, 2018년엔 전무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IPO 시장이 호황을 보이면서 스팩을 통한 상장 수요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스팩 합병 건수는 17건으로 2017년(21건) 이후 가장 많았다. 올해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스팩 열기에는 온도 차이가 크다는 설명이다. IB업계 관계자는 “한국에선 스팩의 공모 규모가 100억원 안팎이어서 주로 덩치가 작은 기업과 합병하게 되는 한계가 있다”며 “또 합병할 때 한국거래소 심사를 받아야 해 미국만큼 절차가 간단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는 스팩 합병에 대해서도 깐깐하게 심사를 하고 있으며,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미국은 별도로 스팩 합병 심사를 하지 않는다. 공모 규모도 천차만별이다. 미국 헤지펀드 업계 거물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이 만든 스팩인 퍼싱스퀘어톤틴홀딩스(PSTH)는 지난해 7월 40억달러를 조달했다. 대규모 조달 자금을 바탕으로 초대형 기업과도 쉽게 합병한다. 지난해 18억달러를 공모한 처치힐캐피털Ⅳ(CCIV) 스팩이 지난달 테슬라 라이벌로 꼽히는 루시드모터스와 합병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루시드모터스 기업가치는 240억달러에 이른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