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발행을 늘려 기업어음(CP)과 은행대출 등 단기부채를 상환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연초 회사채 시장 활황 속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재무 안정성을 높이는 모습이다.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확대는 위기에 대비해 유동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차원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 3년간 기업들이 빚을 갚기 위해 회사채를 발행한 비중은 38.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시설자금이나 운영자금 용도였다. 그러나 지난해는 차환목적 회사채 발행이 67.1%에 달했고, 올해는 기존 회사채 뿐만 아니라 다른 부채까지 상환하고 있다.

넘치는 회사채 수요, 물 만나 노 젓는 기업들

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CJ는 오는 10일 1500억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해 4월 만기가 돌아오는 1000억원 규모 회사채를 차환하고, 남는 돈으로는 우리은행의 한도대출 800억원 가운데 500억원을 갚기로 했다. 지난 2일 CJ 회사채 수요예측(사전청약)에 8900억원의 투자금이 몰린 것을 감안하면 발행규모를 확대해 은행 대출을 모두 갚을 수 있을 전망이다.

지난달엔 롯데지주가 회사채 4000억원을 발행해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차입한 총 2500억원의 대출금 가운데 2100억원을 갚고, 어음 780억원을 결제했다. 당초 2500억원을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60%를 증액했다.

같은달 1000억원 규모 회사채를 찍은 지주사 대림도 사모사채 400억원 뿐만 아니라 은행 차입금 400억원을 갚기로 했다. 예년에는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으로 조달한 자금을 신규투자나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차환 용도로 많이 활용했다. 그러나 올들어 회사채를 발행한 신세계와 SK이노베이션 롯데칠성음료 등 다수의 우량기업들이 자금을 어음과 은행대출 등 단기부채 상환에 투입했거나 할 예정이다.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규모를 늘리는 것은 채권 시장에 기관 자금이 몰려 예상보다 많은 돈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롯데칠성음료는 당초 1600억원 규모 채권 발행을 예정했으나 수요예측에서 10배가 넘는 1조7450억원의 자금이 몰리자 발행규모를 2500억원으로 늘렸다. 계획했던 3년 만기 회사채 2000억원 차환 외에 이달 만기인 미즈호코퍼레이트은행 대출 550억원도 갚기로 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3000억원 투자자 모집에 2조1700억원의 넘는 청약이 들어온 데 힘입어 발행액을 5000억원으로 확대했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2500억원 규모 회사채 차환 이외에 네 건의 은행대출 총 1800억원을 갚고, CP 800억원도 결제할 예정이다.
[한경 CFO Insight] 회사채 찍어 은행빚 갚는 기업들
유동성 잔치인가 위기를 예감한 것인가

기업들이 좋은 조달 여건을 활용해 회사채 발행을 앞다퉈 늘린 뒤 단기 부채를 갚아 경영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만기가 3개월~1년인 CP와 은행이 언제든 회수에 나설 수 있는 대출 대신, 만기가 정해진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하면 자금운용에 안정성이 높아진다. 미리 추가 유동 자금을 확보해 단기 금융시장이 경색됐을 때 대비할 수도 있다.

기업들이 이전에 발행한 회사채를 차환하면서 이자율도 대폭 낮아지고 있다. 대림의 경우 이번에 5년 만기 공모사채를 연 1.95%로 발행해 5년 전 연 4.5%금리로 발행한 5년 만기 사모사채를 상환한다. 이자율을 2%포인트 이상 낮췄다. 송태준 한국기업평가 실장은 "우량채권의 경우 없어서 못 팔 정도라 기업들이 낮은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하반기에 금리가 오를 것이란 전망도 있어 자금조달을 서두르는 기업도 많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자금을 끌어모으는 것은 경제 상황을 불안한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여파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장범식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증시가 호황을 이루고 일부 대기업이 호실적을 내는 것에 착시를 일으키면 안된다"며 "코로나19 사태로 항공,여행업을 비롯해 많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장 교수는 "정부가 재정을 쓰고 은행에게 채무자 원리금 상환을 유예하도록 하는 등 연착륙을 유도하고 있으나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기업들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