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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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부터 약 10년간 이어져 온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이 사실상 근로자측의 승리로 끝났다.

20일 대법원 제1부 (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기아차 근로자 3500여명이 ‘정기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넣어 수당을 지급해달라’고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지었다.

재판의 쟁점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인정되는지 여부였다. 통상임금 분쟁에서 신의칙은, 과거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면 정기상여금이 설령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더라도 소급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근로자가 요구하는 금액이 지나치게 커 회사 경영상 어려움이 생기거나 기업 존속에 위기가 생긴다면 지급 의무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1·2심은 이런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고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대법원 역시 이같은 원심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은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을 인용할지 여부를 신중하고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기아차가 최종적으로 내야 할 금액은 지연이자를 제외한 원금 기준 약 310억원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용금액(원금 기준)은 1심 3126억원, 2심 3125억원이었는데, 지난해 2심 판결 이후 2만7000여명이었던 원고(근로자들)의 90% 가량이 소를 취하하면서 3500여명만이 상고심을 진행했다.

신의칙 적용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사건별로 엇갈려 왔다. 2019년 2월 대법이 시영운수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 위반 여부를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고 판결하자 법조계에선 사실상 앞으로 신의칙 적용은 어렵겠다는 분석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올들어 지난 6월과 7월 대법은 연달아 신의칙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아시아나항공 통상임금 사건에선 "승무원들의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만 신의칙에 위배되므로 추가 법정수당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한국GM·쌍용차 통상임금 사건에서도 "피고(회사)는 계속 큰 폭의 적자를 냈는데 원고들이 요구하는 법정수당을 추가로 지급하게 되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에 법원 안팎에선 신의칙 쟁점이 앞으로 치열하게 다퉈질 것이란 전망도 있었는데, 대법은 이날 다시금 신의칙을 엄격히 해석했다.

이날 경영계는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으로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노사가 합의한 임금체계를 성실하게 준수한 기업에 일방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시간외수당을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경영계는 심히 유감스럽게 여긴다”고 밝혔다. 이어 “법원은 신의칙 적용기준을 주로 단기 재무제표로 판단하는데, 이는 치열한 경쟁 속에 전략적으로 경영활동을 하는 기업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는 기업경영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이 제시되지 않아 산업계의 혼란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신의칙 적용과 관련해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함으로써 소모적인 논쟁을 줄여야 한다 ”고 강조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신의칙 적용은 어디까지나 사건별로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 ”이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큰 고려요소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이어 “기아차만큼 규모가 큰 사건에서 신의칙을 인정해버리면 앞으로도 계속 회사측의 이같은 주장을 인정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된다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정민/김일규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