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이제는 '기상 망명족'까지
망명(亡命)은 목숨(命)을 지키기 위해 도망(亡)가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혁명이나 독립운동 등 정치적 요인의 망명이 많았다. 요즘 들어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사이버 망명’과 미디어 콘텐츠 활용을 위한 ‘플랫폼 망명’, 해외 상품 구매를 위한 ‘직구 망명’ 등 생활 속의 망명이 늘고 있다.

‘사이버 망명’의 대표적인 사례가 ‘텔레그램 망명’이다. 2014년 사정기관이 사이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를 차단하기 위해 인터넷과 모바일 메신저 등을 감시하겠다고 나서자, 국내 카카오톡 이용자들이 해외 메신저인 텔레그램으로 대거 ‘망명’했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출신 형제가 자국의 검열을 피해 2013년 독일에서 만든 보안강화형 메신저다. 메시지 암호화와 비밀 대화 등 특수 기능 덕분에 권위주의·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썼다.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도 이를 적극 활용했다.

2009년에는 ‘G메일 망명’ 붐이 일었다.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관련 수사에서 작가 이메일이 공개된 뒤 구글의 G메일로 갈아탄 사람이 급증했다. 이런 것들은 ‘도피형 망명’ 사례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가 되자 자발적 망명이 늘고 있다. 기존 TV의 드라마 시청자들이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로 대거 이동했다. 콘텐츠 소비 패턴이 TV에서 모바일로 넘어가고, 지상파 보도의 신뢰성이 떨어지면서 ‘유튜브 망명족’이 영상 뉴스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최근 장기간 장마가 이어지면서 ‘기상 망명족’까지 등장했다. 기상청 예보가 자주 빗나가자 정확도가 높은 노르웨이, 체코, 영국 등 유럽 기상사이트를 찾는 이가 급증한 것이다. 기상예보의 3대 결정요인인 수치예보 모델, 관측자료 품질, 예보관 역량 중 수치예보 모델의 정확도가 가장 높은 것은 유럽중기예보센터 모델로 알려져 있다.

‘도피형 망명’이든 ‘자발적 망명’이든 그 바탕엔 불신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국내보다 싼 물건을 직접 구입하는 ‘해외 직구’와 글로벌 증시에 투자하는 ‘주식 망명’도 마찬가지다. 물론 ‘망명’에는 대가가 따른다. 사이버 망명으로 인한 불편과 해외주식 투자 손실 등도 감내해야 한다. 오죽하면 이럴까 싶지만, 그나마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글로벌화라는 측면에서 한 가닥 위안이라도 찾아야 할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