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번 위기가 항공사의 잘못이 아니라며 전폭 지원해주는데…. 우리는 자구책부터 내놓으라니 부러울 뿐이죠.”

요즘 국내 항공사의 분위기는 ‘망연자실’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이용객이 자취를 감춰서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게 항공사들의 하소연이다. 지난 15일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이 항공업계에 250억달러(약 30조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뒤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뜨뜻미지근한 한국 정부와는 태도부터 다르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미국 정부가 ‘통 큰’ 지원에 나선 건 항공업이 큰 고용 효과를 유발하는 산업이어서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항공업 종사자는 75만 명에 이른다. 항공사 하나만 무너져도 ‘실업 쇼크’가 올 수 있다. 지원금 가운데 70%가 항공산업 종사자 고용 유지를 위해 쓰이는 건 이 때문이다. 지원금을 받으면 오는 9월까지 직원 정리해고와 급여 삭감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서명해야 한다.

한국 정부도 항공산업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산업은행은 지난 2월 저비용항공사(LCC)를 대상으로 3000억원의 긴급운영자금 대출을 약속했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은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 ‘대기업’이란 꼬리표가 문제였다. 양대 항공사는 대형항공사들을 지원 대상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자구책을 먼저 내놔야 한다”는 답변만 들었다.

평소 사측과 대립했던 항공업계 노조도 정부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싱가포르 정부에 준하는 지원이라도 해달라”는 게 청와대 앞 시위에서 노조가 내세운 주장이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5개 항공사에 총 16조원의 금융 지원을 약속했다.

속도도 문제다. 산은이 3000억원 지원을 약속한 지 두 달이 가까워졌지만, 현재까지 대출이 집행된 건 1260억원뿐이다. 이 중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에 돌아간 560억원은 지난해 아시아나항공에 약속한 경영정상화 지원금 중 일부다.

정부가 지원을 망설이는 사이 국내 항공산업 생태계는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다. 국내 9개 항공사는 모두 유·무급휴직, 단축근무 등으로 인건비 절감에 나섰다. 이스타항공은 최근 직원 300여 명을 구조조정하기로 했다. 한국항공협회에 따르면 국내 항공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산업 종사자는 84만 명에 달한다.

업계에선 정부가 ‘자구책 먼저’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면 ‘고용 쇼크’를 피하기 힘들 것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올까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