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의 고객 인터넷·모바일뱅킹 비밀번호 도용 사건은 사뭇 충격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금융감독원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도 1년4개월 동안 피해 고객 2만3000여 명에게 알리기는커녕 별다른 조치 없이 뭉개왔다는 사실이다(한경 2월 6, 7일자 A1, 2, 3면). 천신만고 끝에 ‘데이터 3법’이 통과되면서 핀테크 발전을 꾀하자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은행 비밀번호 도용은 전체 점포의 4분의 1이 넘는 200여 곳에서 빚어졌다. 은행 안에 폭넓게 퍼진 안전불감증, 도덕불감증이 놀랍다. 금감원은 “고객의 금전 피해가 없었다”며 장기간 조치를 않았던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신고센터를 운영한다거나, 다른 은행들은 물론 타 금융권에서도 비슷한 도용이 없었는지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이상 피해 발생 여부는 속단할 수 없다. 더구나 ‘피해가 없으니 문제될 것도 없다’고 한다면 위험한 판단이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도 훔친 물건만 없다면 문제가 없다는 논리인가. 어떤 금융업도 신뢰가 무너지면 산업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나.

국내 은행들은 불황의 와중에도 덩치를 키워 신한처럼 자산규모가 500조원을 넘어선 곳도 나왔다. ‘손쉬운 장사’라는 주택담보 대출이 급증하면서 은행마다 연간 순이익이 2조~3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정보·안전관리와 고객서비스는 한참 멀었다. 은행들이 알고도 규정을 위반해 관치(官治)를 자초해서는 곤란하다. 감독당국도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근래 “금감원의 ‘현장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는 금융계 평가가 들린다. 금감원이 사전감시자(gate-keeper)로서 제 역할을 소홀히 하면 금융산업 선진화는 헛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소비자 보호책이 미흡하다”는 감사원 감사 발표에 금감원은 부응책을 조기에 내놔야 한다. 현장과 유리된 채 금융 발전에도, 소비자 보호에도 기여를 못 하면 다시 ‘공공기관’으로 지정돼 정부로부터 온갖 간섭과 감독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감원이 외쳐온 ‘금융감독 독립’은 스스로에 달렸다.